한국교회의 서구화(西歐化), 과연 막을 수 있을까?
기독타임스는 지령 500호를 맞아 한국교계의 쇠퇴원인이라고 지적된 '한국교회의 서구화'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본지에서는 10여년 넘게 유럽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유럽교회를 직접 체험하고 느끼고 돌아온 안성삼 목사에게 같은 주제로 옥고를 청탁하게 됐습니다. 현재는 예장개혁 혜성교회에서 교회개혁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며, 개혁적 목회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안목사의 원고를 게재합니다.
안성삼 목사는… (062-223-4872 neosamuel@hotmail.com)
* 벨기에 컨티넨탈 신학대학원(C. T. S.)에서 영성신학과 선교학 전공
* 예장 (개혁) 총회파송 선교사로 베네룩스 지역에서 12년간 사역
* 현, 벨기에 부뤼셀 대표
* 현, 벨기에 불어권 복음주의 연맹(F. E. F. B.) 소속 목사
* 현, 광주 혜성 교회 담임목사
글 싣는 순서
1. 문제의 발견 -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겔37:2)
2. 마이너스 성장이라니! -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계2:5)
3. 한국교회의 현주소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마23:37)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4)
본질 벗어난 세속화 …"올 것이 왔다"
1. 문제의 발견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겔37:2)
<벡헴>W. A. Beckham 은 1995년에 (제2의 종교개혁) 이란 책을 써서 기성교회에 대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하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시도했던 것입니다. <벡헴>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회성장 학자들과 의식있는 목회자들은 심층적인 연구를 거듭하여 오늘의 피폐해진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소생할 날만을 고대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멀찌기 떠나서 바라보니 한국교회 현실이 바로 보여…
88올림픽을 마치고 1989년 필자가 서유럽의 선교사로 떠날 때만 하여도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이란 말은 상상도 못할 어구였습니다만, 얼마후 간간이 송달해주는 교계신문에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이란 말이 나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나의 눈에도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이 비춰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습니다. 한국교회 내부에 속하여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교회의 문제점들이 유럽사회와 유럽 교회로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았을 때 그리고 유럽교회를 점점 알아갈 때 한국교회의 문제는 나의 근심으로 다가왔습니다. 평소 교제하는 유럽의 목사님들은 한국 교회를 대단한 교회로 평가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너희들도 어디 좀 더 두고보라>는 식이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입니다. 유럽생활 2년째부터는 한국에 있었을 때보다 더욱 진하게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압박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구라파의 텅텅 비어 가는 예배당 현실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해…
유럽교회의 동공화(洞空化) 현상은 독자들이 익히 들어서 아는바 일 것입니다. 아름답고 거대한 성당과 교회당들이 사람이 없어 비어 가는 현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할 정도입니다. 유럽의 사역자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과거 잘나가던 시절에는 자신의 교회당들도 교인들로 가득가득 찼던 시절이 있었다고 귀띰해주었습니다.
필자가 사용하는 부뤼셀의 <유로미션센타> 건물도 오랫동안 비어있던 40년 전에 건축한 성당을 매입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럽에는 지금도 매물(賣物)로 내놓은 교회관련 건물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러한 유럽의 현상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는 이들은 <유럽 신학의 좌경화>와 <물질 만능주의의 세속화>를 주로 꼽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그 이전의 원인은 없었다는 말일까요?
2. 마이너스 성장이라니!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계2:5)
교계의 한 지도자 목사님의 넋두리가 생각납니다. 그 목사님은 마이너스 성장추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교회성장 세미나에 등록하여 한 주간동안 교수들의 열강(熱講)을 경청하였습니다. 강사들은 한국 교회의 많은 문제점들을 분야별로 들추어 시원하게 분석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단 한마디의 대안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나머지 그 목사님은 한 강사에게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 해결점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한국 교회가 다시 살수 있다는 말입니까?”
강사가 답하기를 “그러니까... 우리들이 지금 연구중이지 않습니까?”
그 목사님은 그 이후로부터는 그런 시간낭비식 세미나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몰상식이 상식이 될 만큼 심각한 정서적 증후군을 앓고있어…
12년만에 귀국한 필자의 눈에 비친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필자가 맨 먼저 교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느낀 주제들은 <교회와 물질에 관한> 주제들이었습니다.
- 모모 목사님은 작은 승용차만 타신단다.
- 모모 목사님은 출장비 남은 것을 반납하신단다.
- 모모 목사님은 심방 시에 봉투를 받지 못하게 한단다.
- 모모 목사님은 물질에 초월한 성직자란다.
한국 신자들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대단한 이야기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이어야 할 교회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몰상식에 가까울 만큼 젖어서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이미 상식화 된 수준을...
목사님이 가짜 박사학위라도 받도록 만든 장본인이 성직자 아니면 평신도…
세상에서 얻지 못한 명예심을 교회 안에서 채우고자하는 신도들의 행태는 교회 직분자를 선택할 때 선거운동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의 목회자 초빙 조건을 보면서 필자는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그 후보자가 얼마나 인품이 훌륭하며 개인 기도시간이 얼마이며 목회자로서의 은사가 어떻게 증명되고 있으며 리더십이 어떠하며 개인 영성의 수준이 어떠하며 과거 목회의 족적이 어떠했느냐의 기준은 전혀 보이지 않고, 무슨 대학 졸업자, 박사학위 소지자,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는 자... 등등 기준이 마치 대학 교수를 모시는 광고 같았습니다. 이는 교회가 얼마나 본질에서 벗어날 만큼 심각하게 세속화되었는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목사님들이 가짜박사 학위를 받고있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을 정도입니다. 평소에 순전하기만 했던 목사님으로 하여금 가짜 박사라도 받아야겠다는 마음을 갖도록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선교사, 현실 도피인가? 유학 빙자인가? 대교회 부임을 위한 징검다리인가?
필자는 총회파송 제6호 선교사로 교단이 지정해준 서유럽으로 떠났었습니다. 그 이후 많은 후배 선교사들이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대견스럽고 아름다운 일로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듣기에 거북스런 소리도 간간이 들립니다. 어려운 한국의 목회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혹은 해외 유학을 대신하여, 혹은 소위 대교회 부임을 꿈꾸며 경력을 채우기 위한 징검다리로써 선교사의 타이틀을 얻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실제로 필자는 이런 부류의 선교사를 몇 사람 알고있고 이들로부터 사역상 크게 피해를 입은 경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주님만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당당하게 떠나야 할 선교사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성교회에 아부를 떠는 선교사의 모습으로 바뀌고 사역 현지에서 보내는 시간보다는 본국에서의 모금운동에 더 치우치게 됩니다. 일부 철부지 사역자들은 교인들에게 선교에 대한 비전과 철학을 심어주지 못하고 다만 교회의 주보를 장식하기 위한 생색내기식 선교 후원으로 전락하도록 교회를 지도하기도 합니다.
3. 한국교회의 현주소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마23:37)
어느 성도님이 한국 교회의 한 지도자를 지칭하여 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저분은 성경과 정 반대로 살아가실까...!> 오죽했으면 평소 존경했던 사역자를 향해 평신도의 입에서 그런 기가 막힌 말이 흘러나올까? 나의 귀에 들려지는 그 소리는 한 때 이스라엘 교계 지도자들을 향해 한탄하셨던 예수님의 한숨소리로 들릴 때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아도 우리는 쉽게 주님의 깊은 탄식소리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 언론, 일부 교계 지도자를 위한 입술인가, 아니면 세상의 참 빛인가...
교계에 많은 종류의 신문이 발행되고 방송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독특하면서도 바른 소리를 내야하는 사명을 안고 시작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어떤 신문을 대하다보면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기독교 신문이라는 타이틀을 걸어놓고서도 교계의 일부 지도자들에게 아부를 떨며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언론들로 비추어짐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공적이어야 할 신문이 특정인의 수종이 되어 그의 입노릇을 해주는 경우도 보고 있습니다. 특정 단체나 특정 교단의 관보(官報)라면 발행 목적 자체가 해당 기관의 대변이나 홍보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소리>가 될 것을 다짐하고 서약하고 출발해서 기도하면서 운영하는 <기독교 미디어>라면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바른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교회는 교회라는 특수성 때문에 교회 내에서는 미처 다루지 못하는 부분까지 기독교 신문이나 방송은 바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들이 바른 소리를 못하고 있을까요? 추측컨대 바른 말이라도 한마디했다가는 누군가를 자극하여 구독 부수라도 떨어질까 봐, 아니면 물질적 후원이 끊어질까봐 두려워서 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문은 우리같이 순수한 독자들이 기대하는 대로 세상의 참 빛이 되어주는 기독 언론이 아니라, 피차 먹고살기 위한 허울만 좋은 언론이라는 의미인데, 그런 매스컴이라면 출판계나 방송계에 또 하나의 공해(公害)만 추가하는 샘입니다. 주님이 뒷책임을 져주실 줄을 믿고 담대하게 바른 소리를 질러줄 수 있는 매스컴이 아쉽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자신의 이익의 재료로 삼는 소위 선교회 간판들...
<선교회>란 간판을 붙인 기독교계의 사업체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에는 밤하늘에 비추이는 한국 교회의 빨간 십자가들이 돈벌이 시장(市場)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선교회>란 이름을 붙일 것이 아니라, 차라리 정직하게 정당한 회사나 사업체의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왜 거룩한 이름과 성호를 도용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자신의 이익의 재료로 삼아야 합니까?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상대로 상도덕을 잘 지키며 물건을 정당하게 팔아서 그 이익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업도 주님이 인정하신 직업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치리만큼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거나 교회의 성스런 직분을 간판으로 내세워 거짓신용이라도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해석에 따라서는 자칫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신종 강도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 양심과 상도덕에 충실한 기독 실업인(實業人)들이 더 많아져서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업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았으면 하는 바램을 개인적으로 가져봅니다.
거룩한 성도들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하기로 약속하고 피와 땀과 눈물로 세우는 교회당 공사를 양심을 속이고 부실공사로 때움질 하거나, 그것도 부족하여 부도까지 내고 건축을 중단함으로 세인들의 지탄을 받게 만드는 업주들이 대부분 교회의 고위직분자들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이 일들로 부끄러워하고 자숙하기는커녕 다시 얼굴을 내밀고 교계의 더 높은 지도자가 되겠다고 임원단에 입후보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도 무섭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사역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스포츠센터가 아니라 기도실과 연구실이어야...
귀국 직후 어느 날 어느 사역자와 급히 통화할 일이 있어서 교회와 사택으로 연락을 취했으나 연락이 닫지 못하고 어느 스포츠센타로 연락 해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후로도 번번히 그런 일이 있었는데, 또 다른 사역자는 번번히 사우나 장으로 연락해야만 연락이 닫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이 일로 인해 한국교회의 무감각성의 심각함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사역자가 기도원이나 교회나 목회연구실이나 목회세미나 현장이 아니고 스포츠 센터로 연락해야만 연락이 될 수 있는 사역자가 있다는 점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은퇴한 사역자라면 건강관리나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합시다. 교회의 연합활동 차원에서 건전한 스포츠 모임을 통해 단합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가장 바쁜 사람으로 알려진 현직 기독교 사역자가 평소 건강관리를 해야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일 그것도 대낮에 스포츠센터나 싸우나장에서 얼쩡거리고 있다면 이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며... 한번쯤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역자의 물질 사용 자세는 성도들의 피땀으로 나온 헌금을 받아 사용하는 자들임으로 작은 푼돈을 쓰더라도 삼가 조심해야 하며, 있어야 할 자리는 꼭 오해받지 않도록 둘러보아서 앉으라고, 저는 목회자 선배들에게 귀에 박히도록 배웠습니다. 개척교회라면 전도하는데 시간이 무척이나 바쁠 것이고, 벌써 자리잡은 교회라면 양떼들을 살피고 양육하는 일에 갑절의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역시 시간에 쫓기는 신세가 사역자 아니겠습니까?
과연 나는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종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쓰이고 있는가...
기독교계 신문들의 광고란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부흥사가 되고 싶었으면, 사례 안 받고 무료로 부흥회를 해줄 터이니 연락하라고 합니다. 사역자가 거저 받았으니 거져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려니와 본인에게서 부흥사의 은사가 엿보인다면 선전하지 않아도 어느 교회가 당연히 그분을 불러 세워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진정 주님의 종이라면 주님이 필요로한 곳으로 억지로라도 보내실 터이니 지금은 주어진 목양지에서 충실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사역자는 자신에게 어떤 어떠한 특기가 있으니 교회에 불러 강단에 세워달라고 낫 하나 붉히지 않고 노골적으로 부탁하는 이들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역자는 신문지상에다 자기자신을 주님보다 더 위대한 사역자(?)로 지나치리만큼 과대 선전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언젠가 필자도 그런 선전에 속아 큰 기대심을 갖고 어느 분이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해 본 적이 있습니다.
감히 필자가 평가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 집회에서는 그에게 기대했던 영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과장된 자기자랑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함께 데려간 교인이 민망스러워 할 정도로 모방의 천재일 뿐 부흥사로서의 은사가 전혀 엿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오직 자신의 목양지에서 최선을 다해 충실한다면 누구도 탓할 바는 아닙니다. 오히려 멋진 것이지요. 성도들이 최선을 다해 베푸는 사례에 만족하지 못하고 소위 대교회 목회자들의 수준이나 넘보는 사역자들이 있다면, 혹시라도 사례금을 더 모으기 위하여 집회인도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목양지를 소홀히 하고 노랗게 바랜 옛날 설교노트 한 권을 가지고 이곳저곳 보따리 장사(?)를 하는 이가 있다면 원래의 목양지로 원위치할 것을 호소합니다.
이 차제에 자신에게 맡겨진 몇 안되는 주님의 양들울 위하여 최저의 생활비에도 불구하고 먹이시고 입혀주신 주인님께 감사 감격하면서 사역하는 충성스런 하나님의 종들을 주목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목양지는 다 허물어져 가고 양떼들은 흩어지고 다 말라 비틀어져 가는데, 외부 초청 강사는 왠말이며 더더욱 부흥사는 왠말입니까?
자신의 교회에도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는데, 어느 교회에다가 부흥의 불을 지피겠다는 것입니까? 자신의 목양지에서도 영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역자가 어느 교회에서 성령사역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아무리 내 얼굴을 모르는 교인들이라지만 눈속임은 그만하십시오. 어쩌다가 성도들의 기도 응답으로 환자 한 사람 치료받은 사건 하나 가지고 마치 전문 치유사역자나 되는 것처럼 떠들고 울거먹고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아무리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사역이라도 하나님께 붙들려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쓰어 지려 몸부림쳐서야 어찌 불안해서 살겠습니까?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역자여, ????처음 가졌던 마음을 버리지 말자????
-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4)
구라파의 기독교정신은 본받아야 하되, 서구의 영성은 본받아서는 안돼…
대부분이 기독교국인 유럽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특성은 뿌리 깊은 <기독교 정신이나 기독교 문화>이었지만 <참된 영성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기독교적 정신>으로 사는 것과 <영성적인 삶>으로 사는 것은 처음은 비슷하나 나중에 가면 차이가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제아무리 정직한 것 같고 사랑이 많은 것 같아도 <영성>이 없는 그런 정직과 사랑은 그들 자신들의 기준대로 하는 것이지 성경이나 하나님의 기준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을 상실하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속에 참된 사람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참된 사람됨이 없을 때 그곳에서는 여전히 그들 나름대로 사람을 해치는 결과만 나타나게 됩니다. 모든 기준이 자기 중심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성>을 회복해야 하나님의 기준 속에서 참 사람으로 회복될 수 있고, 그때 비로소 사람을 해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가보면 기독교적인 정신만으로 사는 사람은 세속정신으로 사는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게됩니다. 즉 <휴머니스트>가 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여 <참 그리스도인의 영성>으로 사는 사람은 결과가 다릅니다. 그들은 끝까지 <신본주의자>가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교회가 유럽의 기독교 정신과 문화 같은 긍정적인 면을 많이 배워야 하겠지만, 부정적인 측면인 영성적인 면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사역의 본질을 회복하여 우선 순위를 정하고, 초심을 버리지 말아야…
한국 교회가 성장 둔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역자와 교회가 자신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프로그램 개발 이전에 <기도와 말씀 증거에 전무하는 운동>이 앞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국 교회가 우선 순위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전날과 같은 교회 성장은 쉽게 회복할 수 있을만한 저력을 이미 간직하고 있다고 봅니다.
요즈음은 해외 세미나를 통하여 이 시대에 모범적으로 성장하는 국내외 교회를 방문하여 배울 기회가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을 배우기 이전에 숨겨진 그들의 영성을 찾아 발견해서 개혁신학의 필터에 걸러낸 다음 우리의 방식으로 적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자 자신들이 처음 신학공부를 결심했던 시절의 초심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시절의 뜨거운 가슴을 되찾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신학교에 가기로 최종 결정하고 집을 떠날 때 저의 신앙을 지도해 주시던 교역자께서 주신 권면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운동 좋아하는 사람, 영화관 가기 좋아하는 사람, 도서관에 가기 좋아하는 사람, 성경공부 좋아하는 사람, 기도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눈에 띨 것이다. 너는 항상 기도하는 선배나 성경공부하는 선배와 가까이 지내도록 하거라…>
그 권면에 순종하여 필자는 산 속에 아무도 모르는 기도 굴을 만들어 홀로 기도하였고, 매주 하룻밤씩 지새우며 성경을 연구하고 독서 발표를 하던 선배님들의 모임을 하나 발견하고 주전자에 물을 떠다 나르는 심부름꾼 신분으로 자원하여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그분들이 토론하는 대화내용들이 당시 신입생이었던 나의 수준으로는 이해하기에는 버거웠으나, 그분들이 소개하는 책들은 반드시 필독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따지고 보면 그때 선배님들 곁에서 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워치맨 니>와 < R. A. 토레이>의 저술들은 내가 영성에 눈을 뜨고 영성신학을 전공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본받을만한 사표를 정하고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사역을 즐길 수 있어야…
그리고 우리는 시대마다 주님이 특별히 세워주신 모범된 사역자들을 사표로 정해야 합니다. 그들로부터 맨토링(개인지도)까지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 눈에 띠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분명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은 평소에는 드러내놓지 않고 살기 때문에, 그들과 깊이 교제하기 전에는 찾아낼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또한 자신의 사역을 귀히 여기고 즐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역의 범위가 크든 작든 나에게 귀한 하늘 나라의 사명을 맡겨주셨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 감격하면서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데로 곁눈질하거나 갈등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은 교인들이나 사역자들이 수십년된 성장한 교회를 보면서 부러워한 나머지 갈등을 느끼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대형교회 콤플렉스>를 이기지 못하여 큰 교회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스로 장기 성장 전략을 세워 꾸준하게 사역 해야할 뿐만 아니라, 교회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양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기본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바로 오늘 나에게 붙여주신 양떼를 귀히 여기고 보살피는 일에 혼신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내게 붙여주시지도 않은 남의 목장이나 양떼에게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 했으나 내 곁을 떠나는 성도들에 대해서도 더 이상 <나에게 붙여준 양이 아닌가보다> 하는 여유있는 마음으로 갈등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단 공포증에서 벗어나려면 교회가 이단과 참된 영성을 구분할 수준이 되어야…
더 나아가 사역자들이나 교인들이나 모방만을 일삼지 말고 자기 달란트나 은사개발에 힘을 기울여서 활용하도록 해야합니다. 하나님은 모조품을 사용하기보다는 나의 개성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단의 장벽과 더불어 지나친 형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지나치게 새로운 것은 이단적인 것으로 오인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성령론이 아직도 정립되지 않은 신학 현실에서 영성적인 면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단 공포증> 때문에 참된 영성을 구분하지 못하고 애매하고 외형이 비슷한 것은 무조건 이단시 해버릴만큼 분별력이 취약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는 (마22:29)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간장을 못 담그는 격입니다. 분별력에 자신감 없는 수준을 단지 흑백논리로 과잉반응 한다고 해서 영적 무지에 대한 수치심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여성이 배가 조금 부르다고 해서 무조건 아이를 잉태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여 뱃살이 돋을 수도 있고, 뱃속에 혈종이 생겨 배가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첨단 의료 장비를 동원해보면 원인은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급히 수술을 하든지,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하든지, 몇 개월을 인내로 더 기다려 새 생명을 탄생시키든지... 처방은 각 각 다른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 분별의 첨단 장비를 구비해야 합니다. 분별이 애매할수록 <영분별의 은사>를 구하여 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구별이 어렵다 보니, 진짜 싸워야할 이단을 바로 곁에다 놔두고 자중지란으로 엉뚱하게 에너지를 허비하기 쉽습니다.
유럽에서 영성신학을 전공한 필자의 안목으로 본다면 한국교회가 영성운동을 카리스마 운동(은사 운동) 으로 생각하는 수준을 빨리 벗어나야 하리라고 봅니다. 그나마 서구 개신교회가 명맥을 이어가며 교회를 살려내고 있는 영성운동은 단순한 은사운동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카톨릭의 영성도 아닙니다. 개혁자들의 독특한 영성인 것입니다.
맺는 말 : 후손들에게 개혁정신과 개혁주의 영성을 계승해야…
모세와 여호수아 세대가 지나자 이스라엘이 옛신앙을 버리고 주님의 이름이 모독 당하도록 방치한 것처럼, 서구 교회는 개혁자들이 피를 흘려 이룩한 개혁신앙을 버리고 교회가 모독 당하도록 방치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선진들이 피로 세워준 한국 교회를 지키고 믿음의 계대를 이어나가기 위하여 후손들을 위한 교회학교 교육과 장학사업에 충분히 투자하고, 농어촌 사역자들과 개척교회 사역자들을 위한 장단기 계획을 교단적으로 초교파적으로 세워서 그들의 자녀 교육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도록 하고, 사역자의 최저 생활비가 보장되도록 함으로써 그들이 오로지 복음전도의 사명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대책 마련을 속히 할수록 좋을 것입니다. 사역자가 기도와 복음전도 운동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대책 마련이 되어질 때 <날마다 구원받는 수가 더해지게> 될 것이며 한국 교회의 미래는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교단의 원로 목사와 원로 장로들의 오랜 경험들을 십분 활용하여 남은 여생 어려운 교회들을 순회하며 후배 사역자들과 교회의 핵심 일꾼들을 격려하고 집회를 인도해줌으로 한국 교회 재부흥운동에 앞장서 기여했으면 합니다. 그리할 때 한국교회 안에 <원로들의 횡포><원로 정치> 라는 불명예스런 단어가 사라지고 오히려 원로에게 배우고 존중하고 따르는 풍토가 조성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할 수 있다면 개신 교회들이 개혁주의 영성을 제대로 계승하여 고귀한 개혁정신과 개혁신앙을 이어가도록 시대 상황에 역행하지 않는 커리큘럼 편성으로 신학교와 신학 교수들의 역할분담이 제대로 배려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미래의 한국교회가 재앙이 아니라 화관을 쓰는 축복을 받도록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갔으면 하고 고대해 봅니다.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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