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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붙잡고 사는가?
운영자 2018-03-21 추천 0 댓글 0 조회 627

- 삼상241~7/ 무엇을 붙잡고 사는가?

- 18-3-18/ 주일낮/ 반석교회


1950년대부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가 쓰기 시작한 말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이란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스트모던시대라고 부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문자 그대로 '포스트'라는 말과 '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결합되어 생긴 말입니다. 그래서 후기 현대주의 또는 탈(앞서가는) 현대주의라고 부릅니다. 포스트모던의 경향과 관련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우리 시대의 몇 가지 두드러진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속화입니다.

어느 시대나 세속적인 것은 있었지만 오늘날은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미래나 내세에 대한 관심보다는 먹고 사는 것과 감각적으로 즐기고 느끼는 것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 짓고 장사하고 즐기고 느끼고 노는 그런 일상적인 세속에 취하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므로 영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가치의 상대성입니다.

가치가 바뀌는 현상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없어집니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19세기만 해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살인이나 간음은 큰 죄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든 믿지 않던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도덕적 가치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를 지나면서 이것이 깨어져버렸습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은 전통적인 도덕 체계에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왜 남자는 꼭 여자와 결혼해야 하고, 여자는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가?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하면 안되는가? 안된다면 왜 안되는가? 도대체 누가 안된다고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모두가 공감하던 도덕적 가치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실용주의입니다.

현대인들은 "이것이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묻기보다는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묻습니다.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이렇듯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러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바다 위를 표류하듯 살아가면서 삶의 가치를 규정해 줄선명한 기준'을 찾고 있습니다.

변함없고 믿을 수 있을 만한확실한 기준'은 없는 것인가? 목숨을 걸만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달라져도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를 붙잡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과 말씀 중심의 가치관으로 무장하여 표류하는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다윗은 오늘 우리들이 부딪치는 상황만큼이나 힘겨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꿈과 희망에 부풀어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을 만나면서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도망자로서 끝없는 유랑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 왕이 뻗치고 있는 죽음의 손길을 벗어나 마침내 꿈꾸던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각자 흩어져 있던 민족을 하나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온갖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위대하게 쓰이게 된 그 힘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바로 변함없고 믿을 수 있을 만한 '확실한 기준'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은 성경에 무려 1,034번이나 나옵니다. 성경 66권 가운데 28권이 다윗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장수로는 66장에 걸쳐 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14, 요셉에 대해서도 14, 야곱에 대해서는 11, 엘리야에 대해서는 10장을 할애하고 있는데 비해 다윗에게 66장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성경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무려 1034번 기록 /성경 66권 가운데 28권에 기록/다윗에게 66, 그러면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붙잡고 있었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신뢰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로부터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 원수나라인 블레셋을 동원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 땅에서의 위기를 벗어난 다윗은 '엔게디' 황무지로 몸을 숨겼습니다. '엔게디'는 사해 근처의 뜨거운 광야입니다. 그곳에는 많은 굴들이 있어서 무더운 더위를 식히기에 아주 적당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무리들과 함께 '엔게디' 황무지의 굴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은 곧바로 사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끝나자마자 즉시 3천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엔게디' 황무지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뒤를 보러급히 굴 하나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던 중 변을 보기 위해 굴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굴에 바로 다윗이 숨어있는 곳이었습니다.

갑자기 환한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지만, 어두운 곳에 있던 사람은 밝은 곳에서 들어오는 사람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지요. 극장에 들어 갈 때 그렇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사울이 급한 용무로 굴에 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볼일을 보고 있는 사울의 모습을 발견한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여겨질 만큼 완벽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다윗은 옷자락을 벤 것마저도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무서운 유혹은 보복하려는 유혹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을 괴롭힌 사람을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응당한 보복을 하고 싶은 것이 타락한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향해 보복하고 싶은 유혹을 극복했습니다. 오히려 복수하려고 마음먹고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조차도 부끄러워 가슴아파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없앨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으로 품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보복하고 싶은 무서운 유혹을 물리치고, 사울을 품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선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선명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1. 다윗은 기회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따랐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와 명분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일시적인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기에 다윗은 사울을 향한 무서운 보복의 유혹을 극복하게 된 것입니다.

3절과 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다윗의 사람들은 보기에 지금의 상황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회로 보였습니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단순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논리로 다윗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원수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죽지 않으면 대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고통은 지속될 것이고 잘못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에게도 충분한 근거와 명분이 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시겠다는 분명한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을 죽이면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뜻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대적하고 보복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을 죽여도 정당방위(正當防衛)가 성립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변 사람들이 주장하는 기회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따랐습니다. 다윗은 실리와 명분, 주변의 이야기, 환경, 일의 정황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을 주장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기를 원했습니다.

6"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라 하고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기로 작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사람을 치는 것이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회가 좋아도 살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명분이 그럴듯하여도 살인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큰 죄악입니다. 다윗은 살인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며,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진리를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철학은 모든 기회를 다 이용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모든 기회가 다 하나님의 기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잠언 14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의 사람들은 한 가지 중요한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4"여호와께서 내가 네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지금의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 말은 다윗의 사람들이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고 있는 상황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추론해낸 것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자주 범하는 잘못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추론해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요나와 욥바 항구. 마침 .안성맞춤..도자기..유기)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거나,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일들은 바로 기회주의, 이기주의, 편의주의 세상이 만들어낸 불신앙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명분과 기회가 주어질지라도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또 모두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광고들은 사람들에게 일확천금의 기회를 약속하지만 그러나 잘못 따르면 망하는 길입니다.

- 자녀 교육을 위해 술집에 나가는 엄마들도 있답니다. '자식을 위해, 자식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얼마나 명분이 좋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자식을 위하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기회주의자들이 많지만 정말 신실하게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길은 기회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그래서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조금 늦더라도 정도를 걸으시기 바랍니다. 손해가 되더라도 정직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핍박과 멸시를 받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임하게 됩니다.

 

2.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날로부터 언젠가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왕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내신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아직도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 사실을 다윗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8절과 10절을 보시고 다윗이 사울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내 주 왕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은 여전히 받들어 섬겨야 하는 왕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의 신하입니다. 하나님의 세우신 질서 앞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인물들을 보면 자신의 위치를 잘 지켰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주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아직 허락하지 않은 왕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습니다. 결코 왕의 자리를 탐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신하된 도리를 다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는데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너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무엇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삽니다. 바벨탑의 사건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께 도전했을 때, 온 땅에 흩어짐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면 다 흩어지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가, 자식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하게 되면 모두 다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친구도형제도..천사도..)

 

12"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자신의 판단대로 사울 왕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잣대로 왕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나의 잣대로 마음대로 평가하는데, 그리고 그에 대한 죄의식도 없는데......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되셔서 악을 악으로, 선을 선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377절에서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 악한 사람이 형통하는 것 부러워하지 말고 참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모든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악한 자에 대해서는 악의 심판으로 선한 자에 대해서는 선의 심판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오직 여러분은 기도만 하십시오. 하나님의 때만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고소하는 무리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두 돌아가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함부로 비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함부로 심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죄악가운데서 더럽고 추악한 삶을 살아도 괜찮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절대로 악과 짝하지 말고 죄와 친구하지 말고, 더럽고 추악한 세속적인 욕망에 파묻혀 살아서는 안됩니다.

 

결코 죄악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악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심판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면서까지 하나님의 기회를 운운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며,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삶을 맡기겠다고 하는 선명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 합격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다윗은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는 인간,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참된 친구와 나누는 우정입니다. 하나님은 우정이라는 선물을 통해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인간의 행복 중 하나는 좋은 친구를 만나는데 있습니다. 에센바흐라는 사람은 한 사람의 진실한 벗은 천명의 적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 힘 이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인생길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하시고 아름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주 귀중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진리를 따르고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겼던 다윗은 인간관계에 여유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400명의 불행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십시오. 끝까지 의리를 지켰습니다. 다윗은 12지파에 속한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을 정도로 인간관계가 좋았습니다. 다윗은 착한 사람입니다. 선한 사람입니다. 사울을 끝까지 죽이지 않았습니다. 인간관계의 의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삼상 24: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특히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을 보십시오. 그들이 생명 같이 사랑하게 된 것은 그들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정직성과 충성심,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그의 신실한 믿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윗의 생애는 곧 예수님의 생애의 축소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따르며,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시험을 당하실 때, 마귀가 던져주는 기회와 명분을 다 거절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이것이 마귀를 물리친 비결입니다.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기 위해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다 감당하시고 승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온갖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하며, 온갖 편의주의와 효율성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세상에서 넘어지지 않고 굳건하게 설 수 있는 비밀은 바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서 사는 것 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는 선명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한 요나단처럼, 우리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 하신 분이 계십니다. 다윗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요나단처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기의 목숨 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다윗을 아낌없이 칭찬하고 위로하고 격려한 요나단처럼,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며, 하나님께 우리를 변호하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격려해주십니다. 우리가 가장 어려울 때, 우리 곁에 늘 계십니다.

두 개의 발자국 이라는 시처럼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항상 두 개의 발자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발자국,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발자국, 그러나 정말로 내가 어렵고 힘겨운 걸음을 걸어갈 때, 우리 인생의 발자국은 하나로 바뀝니다. 주님이 떠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쓰러진 나를 주님이 들춰 업고 걸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어려울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세상의 친구들이 함께 할 수 없는 가장 고독한 자리에도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수술실에도, 전쟁터의 포화 속에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은 참된 친구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예수님을 친구 삼고 그와 함께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절대로 여러분들을 고독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항상 내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주님은 들어오셔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지금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지금 어떤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오. 그 안에서 참된 행복과 안식과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좋은 친구가 되십시오. 패역한 세상 한 복판에서 혼자 외로이 방황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요나단과 다윗과 같은 참된 우정을 나누는 영적 친구를 많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아니 여러분 들이 그런 좋은 친구가 되어 사람을 살려야 하겠습니다. 매일 매일 좋은 만남을 가꾸어 가는 반석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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