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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강론) 5:8-17 투기와 쾌락주의에 대한 심판
음두진 2019-02-24 추천 0 댓글 0 조회 770

 

 이사야 5:8~17 / 투기와 쾌락주의에 대한 심판/ 


요즈음 현대인들의 최대관심사가 돈과 다이어트입니다. 과거에는 건강을 위해 많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보약도 먹고 스태미나 음식을 먹기 위한 식도락가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건강을 유지하려면 채식을 하고 먹는 것을 자제하면서 속을 비워야 한다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동물도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속을 비운다는 이론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외적으로 볼 때 다이어트는 균형 잡힌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 합니다. 균형 잡힌 몸매가 본인도 만족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도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인생도 그렇다. 균형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멋스럽게 보인다. 돈을 많이 벌지만 많이 나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인생을 멋있게 사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저글링’이라고 표현했다. 저글링은 공을 하나만 잡는 것도 아니요 한 번만 잡는 것도 아니다. 공을 손에서 놓아가면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재물과 명예를 손에 쥐고 놓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이미 저글링에 실패한 사람이다.

성경은 말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절) 돈을 사랑하여 돈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해에는 선한 사업에 부할 수 있는 균형 잡힌 부를 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자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1. 하나님은 부동산 투기에 빠진 자들을 엄벌하십니다.

 

어렸을 때 동네에서‘땅뺏기(땅따먹기)’라는 놀이를 했습니다. 땅을 더 차지하겠다고 서로 싸우고 애를 썼지만 해질녘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부르시면 모든 것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야박한 경쟁사회 속에서 소유욕을 멈추고 인생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유욕으로 이 땅에서 얻어진 것이 결국 땅뺏기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불행과 많은 문제들이 과다한 소유욕에서 나옵니다. 과도한 소유욕에서 너와 나를 파괴하는 불행이 생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토지와 가옥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매매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설령 매매가 되었다고하여도 율법에 따라서 희년(50년)이 되면 돌려주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부동산 투기를 하여서 큰 땅과 집을 가지고 홀로 만족하는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있었습니다(8).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집들이 반드시 황폐해지고, 아무리 크고 좋은 집들이라도 텅빈 흉가가 되어서, 사람 하나 거기에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9).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아모스 선지자에 의해 기록된 구약 아모스서를 보면 그 때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일으켜서 그들을 치십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중심에는 악한 지도자와 악한 사회풍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의 주요 원인은 지도자들의 타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안일하고 마음이 든든한 자들이었습니다(암6:1). 이스라엘 공동체에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면서 심판은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은 현실에 대한 탐욕적 집착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최고급 외제 상아 침대를 들여 놓고, 최고급 음식을 즐기고, 술에 취해서 헛된 노래를 지절거렸습니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간에 향락과 사치를 일삼았습니다.
  하나님을 비우면 그 자리는 죄로 채워집니다. 하나님을 싫어버린 지도자들에게서는 죄의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담대해져서 악을 공공연하게 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사과상자에 사과를 담지 않고 불의한 돈을 담는 지도자들은 가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정의를 행하는 지도자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지도자로 성장해 갑시다. 그럴 때 이 사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또 성도들은 일체 부동산 투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일부사람이 많은 땅과 집을 가짐으로 가격이 크게 상승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이 집이 없어서 고통을 당합니다. 성도의 땅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땅에 욕심을 가지는 사람은 하나님이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욕심대로 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천국의 영원한 땅을 과연 얻을 수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이 땅에 투자할 부를 오히려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에게 나누어 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딤전 6:17-18,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생명과 사망의 길 외의 제3의 길은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 살든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며 살이야 합니다. 이렇게 선을 구하는 삶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생명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혼란한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부정과 뇌물, 고리대금을 통한 손쉬운 부의 축적과 같은 심각한 죄의 유촉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시대 분위기가 급변하고 성실하게 땀 흘려 물질을 얻게 하기보다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요행을 바라도록 조장합니다. 성도가 정직하게 사업을 하다가도 스스로를 시대에 뒤떨어진 답답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뇌물로 정직한 판결을 굽게하도록 요구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공의보다는 물질을 우상으로 삼아 많은 부의 축적을 최고선의 지표로 삼고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속에서 성도는 물질적인 탐욕으로부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고자하는 일에 최고의 관심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것이 생명의 길이요 마땅한 도리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쾌락주의에 빠진 자들을 엄벌하십니다(11~17).

 

  하나님은 이어서 독주를 즐기고 포도주에 취하는 쾌락주의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 파티를 열고 화려한 음악과 다양한 술들에는 관심이 있어도 도통 하나님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12). 호화로움과 연락(구경하고 놀러나 다니고)으로 세월을 보내고(14), 저들이 누렸던 부귀영화는 지옥에 던져지고 비참한 인생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3~15).
심판의 날이 지나고서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찬양하고(16), 어린 양 같은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평화롭게 맛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17).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19:2).

 

  여러분! 리더십이 타락하면 필연적으로 사회 전체가 타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가 타락하면 그 사회는 멸망을 향해 나아갑니다. 가진 자들이 하나님과 부정한 이익을 맞교환하며 살았을 때, 이스라엘 사회 역시 이러한 가치의 전도 현상이 곳곳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팔아서 돈을 취하는 사회,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팔아서 개인의 이익을추구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법과 정의는 쓰디쓴 쓸개와 독초처럼 쓰레기통에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있어야 할 탐욕과 사치와 부패가 사람들의 마음 속 안방을 차지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술소비는 세계적입니다. 또 요즘에는 원조교제, 성추행, 간통죄 폐지, 동성연애라는 말하기도 부끄러운 정욕적인 문제가 사회를 온통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숨겨진 죄악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끄러운 죄가 세상에서는 감추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명백하게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놀기를 기뻐하며, 그것을 인생의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오늘 말씀은 준엄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한 쾌락주의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힘쓰며,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을 정욕적인 만족으로부터 찾기 보다는 주를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 얻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하고 고상한 기쁨이요, 또한 영원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뒤집어진 이스라엘 사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서 그 사회에 새 질서를 부여하십니다. 이스라엘 사회 속에는 이 시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자본’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사회, 정의로운 노력을 버리고 불의한 대박의 신기루를 쫓는 사회, 이 사회는 지금 판단력 마비증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소망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미끄러져 가는 이 사회에 있어서 유일한 제동장치는 당신의 정의로운 삶입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탄이 찾아와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앞에 놓여있는 10개의 잔 가운데 하나에는 독약이 들어 있고 나머지 잔에는 맛있는 음료수가 담겨있습니다. 독약을 마시면 죽지만 음료수를 선택하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처음에 주저하던 청년은 유혹에 이끌려 내기에 응합니다. 첫 번째 내기에서 다행히도 청년은 음료수를 선택하여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돌아가는 청년에게 사탄은 말합니다. ‘언제라도 내기를 하고 싶으면 다시 오라.’ 청년은 갑자기 주어진 많은 돈을 가지고 세상의 쾌락을 맘껏 즐겼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돈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사탄이 말했던 제안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남겨져 있는 9개의 잔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습니다. 이번에도 독약이 아닌 음료수를 마셨고 역시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이 청년은 다시 그 돈을 가지고 쾌락을 즐겼습니다. 이 청년은 돈이 떨어질 때마다 사탄을 찾아왔고 내기에서 이겼습니다. 어느덧 나이가 든 청년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 이라는 심정으로 사탄을 찾아갔습니다. 2개의 잔이 그 앞에 놓여있었습니다. ‘이번이야말로 마지막이다. 다시는 내가 찾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잔을 들었습니다. ‘이 노인이 죽었을까요? 죽지 않았을까요?’ 죽지 않았습니다.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을 향하여 사탄은 말합니다. “원래부터 독약은 있지 않았지. 너는 나의 유혹에 젊음을 탕진하고 네 인생을 망가뜨린 것이지.”

  여러분 오늘도 이런 사탄의 유혹은 계속됩니다. 결코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않고 주어지는 모든 대가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망하게 하고 갉아먹습니다. 한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묵상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겼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참포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좋은 성도가 되는 것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듯, 신앙의 연수가 쌓여가는 것으로 영적 성장이 따라오는 것이 아니듯, 직분을 맡는 것이 상급과 복의 넓이와 깊이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듯, 성경공부를 단계별로 이수한다고 해서 영성이 깊어지거나 성숙이라는 열매가 맺게 되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의 포도원에 뿌리를 내렸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가 복(福)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신화와 같은 것입니다.
부도난 포도원을 보면서 그걸 수습할 아무런 능력 또한 없는 유다의 가난함을 동시에 보고 있습니다. '포도원의 망대'(1:8)같이 겨우 흔적만 남아 있는 유다, 이것이 무엇 때문에 얻은 결과인지를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외쳐야 합니다. 악한 때에는 지혜자 조차 잠잠히 침묵한다고 합니다(7). 아무리 외쳐도 듣거나 돌이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는 암흑의 시대로 전혀 소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양육강식으로 인한 혼돈과 탄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공의를 외쳐야 합니다. 가족들에게 공의의 삶을 가르치고 친구에게 권면하여 이웃과 사회에 호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선지자적인 삶에는 조소와 멸시, 생명의 위협과 경제적, 정신적 희생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어두운 역사의 현상엔 이렇듯 자신을 바쳐 혼돈과 질곡에 맞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땅에는 더디지만 공의가 살아나고 지혜자들이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어느 공동체나 사회에 이렇듯 공의를 외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는 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회와 공동체를 보존하고 살리는 최후의 등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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