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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강론) 8:11-22 걸림돌이 되시는 하나님
음두진 2019-09-28 추천 0 댓글 0 조회 921
[성경본문] 이사야8:11-22 개역개정

11.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려 주시며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 것을 내게 깨우쳐 이르시되

12. 이 백성이 반역자가 있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반역자가 있다고 하지 말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 할 자로 삼으라

14.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이사야 8:11~22/ 15-9-13주일낮/ 
제  목/ 걸림돌이 되시는 하나님 

 

어떤 사람이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갔습니다. 음식을 먹는데 음식이 너무 싱거워서 맛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 손님은 너무 싱거워서 맛이 없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주인이 그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서 소금을 가져다가 아주 조금 뿌려 주었습니다. 그 때 그 손님은 다시 맛을 보더니 너무너무 맛이 있어서 잘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에 이 손님이 혼자서 생각하기를‘야! 소금이라는 것이 저렇게 맛이 있는 것이구나. 조금만 넣어도 저렇게 맛이 좋은데 많이 넣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을까!’생각하고 그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금을 한말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서 음식이 맛이 없을 때 얼른 소금 한줌씩 집어넣었습니다.
맛이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너무너무 짜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소금을 다시 싸들고 소금장사에게 가서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맛이 없는 가짜 소금을 팔았냐고 큰 소리를 치다가 뺌만 맞고 돌아왔다는 우화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런 우화적 어리석음이나 세상의 일반적 어리석음을 말씀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는 나의 어리석음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어리석음이 무엇입니까? 쉬운 말로 우리들의 어리석음은 유다 백성과 같이 자신이나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과신하므로 말씀을 소홀히 여기거나 말씀을 따르지 않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리석다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유다백성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유다백성의 어리석음이 무엇입니까?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유다 백성들의 어리석음은‘어리석은 자를 하나님보다 더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가 유다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7절에,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제 야곱의 집에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 오늘 본문 말씀은 어리석은 자들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첫째로 어리석은 자는 세상을 더 두려워하는 자.
어떤 동물학자가 개미를 연구한 결과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첫번째 연구는 개미들이 100%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관찰해 보니까 약 20% 정도만이 진짜로 일을 위해 분주하고, 나머지 약 80%는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냥 분주하게 오고 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두번째 연구는 진짜배기 20%를 모아서 한 무리를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100% 모두 다 열심히 일하면서 군락을 형성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대는 하나의 이론에 불과했습니다. 여전히 20% 정도만이 진짜로 열심히 일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개미'만의 문제는 아닌 듯싶습니다. 하나님은 프리즘처럼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자신을 알리십니다. 그러나 '개미'의 경우에서처럼 모든 성도들이 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따라 살지 못합니다.

이사야의 표현대로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식적인 흐름에 편승하여 살아가고 있었습니다(11-12). 하지만 진정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사는 것입니다(13-14a). 아람을 이기는 길이 앗수르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피할 곳'이 될 것을 믿는 사람은 '이 백성의 길'로 행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사람과의 맹약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것에서 해답을 찾던 자들은 함정과 올무에 빠질 것이며, 넘어져 걸릴 것이며, 급기야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14b-15). 이처럼 집요하게 말씀하시고, 선지자까지 동원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지만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신앙인들은 하나님은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무서워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거짓말하며 마음대로 죄를 짓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부끄러워 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는 각자의 양심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죄를 접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오늘의 과학적 용어로 (마이크로 칩, 센서)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창3:1-4)에 보면 사탄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모든 인간들에서 이 양심이 고장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죄를 지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 양심의 칩이 고장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앗수르는 무서워도 하나님이 무섭지 않은 것입니다.
이 고장 난 양심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씀으로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양심이 다시 회복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어리석은 사람 죽은 자에게 구하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너희에게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어 보라고 합니다."(19a)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이사야의 마음이 그런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들들의 이름(18)에서, 그리고 이사야가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들(19)에게서 받는 스트레스가 그것입니다. 큰아들 스알야숩(Shear-jashub, 7:3,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과 작은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Mahershalalhasbaz, 1-4, '노략이 속히 올 것이다.')에게 명명된 이름은 사실 서로 반대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것은 입방아를 찢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메뉴였을 것입니다. 이 고난과 고통은 언제 끝난다는 말인가, 너의 독설 때문에 말이 씨가 되어 패전국 신세가 될 것 아닌가, 누구를 위한 선지자인가, 무엇보다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말투와 얼굴 표정이 보이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친히 명하여 주신 작은 아들의 이름은 이사야에게도, 그 아들 본인에게도 좀 그랬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두 아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징조와 예표가 되는 사인(sign)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만이 아닌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19a). 이것은 이사야의 입장에서 보면 모독이고, 무엇보다 민감한 사안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여론이 만만찮게 형성되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설교와 목회를 인정하지 않고 싶은 마음들이 그 대안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접한 자와 마술사였습니다. 마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민14:1-4)는 불신앙이 득세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대망론'(7:14, 8:8b,10b) 앞에서 보이는 유다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마치 엔돌의 접신녀를 찾는 타락한 사울 왕처럼 말입니다(삼상28:3-14).
이사야의 고통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모세도 광야에서 자신의 지도력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은 문제만 생기면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우리를 애굽에 내버려두지 왜 광야로 데려와 이 고생을 시키는가? 차라리 노에 때가 좋았다” 물에 빠져 죽을 번한 사람을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었습니다. 바울도 사도권의 논쟁에 끝까지 휩싸여있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도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서기관 및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어느 시대나, 누구에게나, 설령 모세와 이사야와 바울처럼 위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사역을 뿌리를 뽑으려고 나무를 흔드는 것처럼 흔들어대고 훼방하고 방해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한 사람들은 함께 생활했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험한 말로, 빈정거림으로, 잘 되는가 두고 보자는 식의 저주로, 여기저기 찔러대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식의 공격으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랑을 준 사람들의 지도력을 무너뜨리려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대단해 보입니다.
우리시대 교회를,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나에게도 언제나 눈물이 있습니다. 어찌할까? 과연 어떻게 목양(牧羊)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과 나의 보람이 될까? 이사야의 목회 환경을 세세히 들여다보면서 동감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본문(19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서 유다 백성들을 비유하기를 유다 백성들을 마치 산자의 것을 죽은 자에게 구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비유하는지 아십니까? 유다 백성들은 지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은 무시하고 신접한자와 마술사에게 가서 구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 구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믿는 성도들이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나와 살아계신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그 답을 구하려고 할 때 이런 자들은 죽은 자에게 구하는 자들이라고 이사야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혹시 유다백성들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아닙니까? 1)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2) 세상 방법으로 죽은 자에게 구하는 자는 아닙니까? 참 신앙인답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더 깊은 묵상
비바람이 몰아친다고 해서 태양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름 위에 태양이 있습니다. 잠시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뿐입니다. 즉, 유다가 심판이라는 시련의 폭풍우를 만났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어지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표(1-10) 뒤에 여전히 '임마누엘'(8b,10b)로 함께 계십니다. 그것만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백성의 길'(11)은 필경 패망합니다(9-10). 그래서 금지 명령입니다.
이사야는 이 땅에 두 부류의 사람이 공존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총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들을 '이 백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떠났습니다. 진노하심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엡2:1-3).
둘째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너희'(12)라고 부릅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비록 현실은 어렵고, 고난이 계속되고, 시련과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할지라도 비구름 위에 도도히 떠 있는 태양을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낙심한 이사야를 도우시며 행할 길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걸려 넘어지는 반석같은 하나님이 되셨습니다(11~15).
당시 정치 지도자들은 친앗수르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노선을 추종치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대표적 인물이 이사야)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반역자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위축될 수밖에 없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저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진정 두려워해야할 만군의 여호와를 두려워하라고 명하셨습니다(13).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가 되는 이유는 죄를 가증히 여기는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북스런 장애물로 여기는 에브라임과 유다는 결국 걸려 넘어지고 부러질 것이며, 함정에 빠질 것입니다. 반면 믿음 있는 자에게 반석은 든든한 기초가 되어 줍니다(마7:25).

마땅히 따라야 할 율법과 증거입니다(16-22).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무시되고 거절되자 하나님은 증거의 말씀을 봉함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 즉 그 마음속에 선지자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질 것입니다(16). 그의 공적 사역이 위축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로부터 얼굴을 돌리시는 이 암담한 때에 선지자가 취할 태도는‘기다림’뿐이었습니다(17).
불안한 불신자들이 신접한 자와 마술사를 찾아 물어도 답을 얻지 못하고 결국 어둠속으로 멸망하게 됩니다(22). 오직 아침빛을 보는 자들은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뿐입니다(20).

살다보면 삶의 위기에 직면하여 고통과 절망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어떻게 극복해야합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가 멸망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미워하여서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무섭게 징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간과할 수없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죄 문제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무서운 징계를 통해서 유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어려움의 원인이야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연한 문제일 수도 있고, 나의 실수나 잘못 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선한 뜻으로 한 것 일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죄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고 또 그동안 자신에게 감추어있거나 잊고 있었던 죄를 기억하고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죄를 해결하고 거룩하여 질수만 있다면, 그 시련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이사야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국인 유다를 멸망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서 자신의 친척과 가족도 다 멸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럴지라도 하나님 외에는 믿을 분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키지만 결국은 다시 구원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날에 이사야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위로를 삼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사야처럼 굳건해야 합니다. 좋을 때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다가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주의 일에 열심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는 위기의 날에도 하나님 한분만을 믿어야 하며, 그분께 우리의 어려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주의 말씀을 사모하고 주의 뜻대로 살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기도 주의 뜻대로 살뿐만 아니라 죽기도 주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날에도 우리가 의지하고 찬송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입니다.

 

- 당신은 어려운 날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당신은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말씀에 더욱 따르고 있습니까?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세에 이를수록 사람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오거나 자신의 삶을 반성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러한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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