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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강론 9:1-7) 놀라운 그 이름
음두진 2020-01-15 추천 0 댓글 0 조회 816
[성경본문] 이사야9:1-7 개역개정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놀라운 그 이름/ 이사야 9장1-7

 

어떤 목사님이 20여 년 전 어느 해 봄 대심방 기간 중에 신림동 지역 달동네에 혼자 사는 할머니 집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많은 집사였습니다. 그 집사님은 하루하루 파출부 일로 살아가는 가난한 여집사였습니다. 너무 가난해 아궁이에 연탄도 제대로 넣지 못해 냉방이었고 장판도 벽 도배지도 낡아 처져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그 집사님은 목사님을 대접한다며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너무나 측은하고 불쌍해 방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벽에 수표 한 장이 붙어있었습니다. 가짜겠거니 생각하고 가까이 가보니 진짜 은행 수표였습니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수표에 적힌 액수였습니다. 집을 한 채 사고도 남은 돈을 은행에 예치한다면 그 이자만으로도 편히 잘 살 수 있는 금액이 적혀있는 수표였습니다.

여 집사님이 찻잔을 들고 들어오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이 수표가 왜 여기 붙어있지요?” "아 그거요. 별거 아녜요. 목사님 차 먼저 드세요” "차는 천천히 마시고요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자 그 여집사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 그거요. 지난해 부인도 없고 자식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병간호를 못하는 할아버지가 있어서 제가 병간호를 얼마동안 해드렸지요. 어느 날 그 분이 저를 부르더니 저걸 제 손에 쥐어주길래 고맙다고 받았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며칠 후 세상을 떠났는데 그 분이 주고 간 선물이어서 기념으로 벽에 붙여두었습니다.”

아니 집사님 저건 돈이에요. 돈도 엄청나게 큰돈이라고요.” “종이 쪼가리가 무슨 돈이래요?”

이건 수표라는 건데요. 이걸 은행에 가져가면 집도 사고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현금이 되요.”

그러자 그 집사님은 혀를 차며 아이고 이놈의 까막눈, 이를 어쩐담!”이라며 푹푹 한숨을 쉬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후 이야기는 모르겠습니다.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점령한 유럽 사람들이 주는 쪼콜렛과 다이아몬드를 바꿨다는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귀한 것도 그 가치를 모르면 휴지처럼 여기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스토리도 이런 이야기들과 흡사한 데가 있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런데 그 귀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영접치도 못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애굽 바로왕의 왕자나 헤롯왕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얘기가 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칭기즈 칸이나 나폴레옹처럼 말 타고 나팔 울리며 나타났다면 사람들이 멸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나셨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힘도 없고 초라한 아기로 나신 것입니다. 태어나신 예수님은 한아기이었습니다. 스스로 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먹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그 당시에는 흔한 평범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름은 알면 알수록 정말 놀라운 이름입니다.

 

오늘의 본문 속에는 아기로 오신 하나님께 대한 다양한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아기에게 왜 많은 이름이 주어져 있을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이신가? 그는 어떤 일을 하였는가? 이것을 한 이름으로는 다 설명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기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그 분은 통치자 이십니다.

   

"그 어깨에는 정사(government)를 매었고" 이 말은 자신의 어깨에 세상을 통치하는 권세를 그분이 갖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어깨라는 것은 힘의 상징입니다. 힘센 사람을 말할 때 우리는 "어깨가 딱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기의 어깨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입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는 이스라엘과 앗시리아의 공격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자"고 외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분, 이제 좀 더 기다리십시오. 마침내, 역사의 지평선에 하나님은 한 구원자를 아기로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바로 민족들을 통치하시고, 열방을 통치하시고, 그리고 우리 개개인을 통치하실 통치자이십니다. 그가 오시고 있습니다. 그는 올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존심을 갖고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막상, 삶의 결정적인 위기와 환난과 어려움 앞에 서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습들을 보십시오!" 이 사람 의지하고, 저 사람 의지하고, 이런 방법을 생각해 보고, 저런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근심 가운데 빠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유다 민족의 역사적 정황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 그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처해있는 현재의 이 안타까운 현실 속에는 주님을 의지하지 못합니다.

"나는 구원 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고통스런 내 현실 속에서는 그 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식상해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희망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정권은 또 다시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인류의 역사, 인류의 정치는 항상 그럴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그 하나님이 어느 날 역사의 때가 찬 시각에 "아기"로 오실 것입니다. 그는 민족도 개인도 다스릴 것입니다. 그는 바로 통치자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바로 그분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 나의 왕, 그 어께에 정사를 멘 왕이십니다. 시편 5:2를 보면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고 시편 145:1에서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신앙이 좋았고 선정을 한 여왕인데, 종종 궁궐을 빠져 나가서 시민들과 사귀고 대화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은 한 과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이 과부는 믿음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는 안하고 서로 기도하고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교제의 꽃을 피웠습니다.

여왕이 그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지금까지 아주머니를 찾아 준 손님 가운데 가장 고귀한 손님이 누구 입니까?” 여왕은 이 아주머니가 믿음이 좋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이라는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아주머니가 그렇게 대답하면 나도 그래요라고 대답하려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함께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그런 기대 때문에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두말할 것도 없이 여왕님께서 찾아주신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내 생애 최고의 손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왕이 실망하여 예수님이 아주머니를 찾아 주신 것이 아닐까요?”라고 물었더니 이 아주머니의 대답이 예수님은 손님이 아닙니다. 내 주인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처음부터 계신 분입니다. 나는 그 분을 위해 존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 여왕이 진한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으로 모십니까? 아니면 내 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통치자 일뿐 아니라,

 

둘째로 그는 기묘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기묘자"는 영어 성경에 보면(His name is wonderful)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분이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기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의 잉태와 탄생부터 모든 것은 놀라울 뿐입니다. 경이로울 뿐 입니다.

이 분은 성령님을 통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분의 생애 또한 놀라울 뿐입니다. 그 분의 기적과 사랑과 탁월한 교훈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 분의 죽음도 놀랍습니다. "한 사람의 이 비극적인 죽음 앞에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은 감동과 충격을 받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죽음입니까?"

이런 죽음은 역사에 없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또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성경대로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 문을 열고 다시 살아나신 놀라우신 예수 그리스도전 세계는 이 사건을 기념하며 살아계신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분의 영광스런 "재림"이 될 것입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수천수만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천지와 우주와 역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그 분! 온 세상이 그분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가장 크게 놀랄 것입니다.

이분은 한 권의 책도 쓰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도서관에 가장 많은 장서들은 그분을 주제로 쓰인 책들입니다. 이분은 한 줄의 시를 쓰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가장 많은 시는 이분을 노래하기 위해서 쓰였습니다.

이분은 단 한편의 음악을 작곡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음악사의 대부분은 이 분을 찬양하기 위해 작곡 되었고, 이분에게 바쳐지고 있습니다.

이분은 단 하나의 예배당도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그분을 예배하는 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교회당이 없는 나라나 마을이 없습니다.

이분은 단 한 사람도, 자기의 신하를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조직을 한 적이 없지만, 군대를 모으신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는 그분을 추앙하고, 그분을 왕으로 고백하고 따르는 충성된 신하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분은 실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성경 속에는 이분에 대한 경이로운 예언들과 이분을 만나본 사람들의 놀라운 간증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의 고향 사람들도 놀랐습니다(13:54). 무리들(7:28,29), 귀신들도(1:27), 모두 놀랍니다(7:37).

사람들은, 그분의 교훈에 놀라고, 그분의 능력에 놀라고, 그분의 사랑에 놀라고, 그분의 생애를 보며 놀랄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재미없습니까? 감격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이분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분의 사랑을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분의 생애를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생명의 활력을 되찾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권태, 무료와 절망과 무관심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것이 바로 그 원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우신 분을 새롭게 만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계속됩니다.

 

셋째로 그 이름은 모사라.

 

"모사"라는 말도, 한국말의 어감보다는 영어가 쉽게 이해됩니다. 영어 성경에는 "상담자(counselor)"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이 번역되던 당시 우리나라에는 "상담자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이 말은 "요에쯔"라고 하는 데, "요에쯔"라는 말은, "지혜로 꽉 차있는 분", "지혜자",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 곁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깊은 근심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께서는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가면, 내가 꼭 같은, 그러나,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 즉 위로자를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내 인생의 길에서,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걸어주시는 분, 내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분, 내 눈물을 보고 계시는 분, 내 가슴의 상처를 치료하시는 그분, 그는 위로자이십니다.

여러분, 마음 답답하시고 외로우실 때, 누군가를 찾아가서 얘기하고 싶지요. 상담자가 필요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3:23) 고통이 없는 인생,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상담자, 지혜자,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상담자가 다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담자는 오히려 손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와 얘기하고 난 후에 "후회"해본 경험이 있으시지요? 괜히 이야기 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일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완벽한 의미의 상담자, 지혜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완전한 상담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그 이름은 모사라),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700년대에 영국에 아주 뛰어난 작곡가 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작곡의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정받지 못하는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공연할 때마다,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의 나이 56세가 되었을 때 그는 완전히 인생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56세에 그는 은퇴를 결심합니다. 그리고 음악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건강을 잃었습니다. 오른쪽은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돈은 다 잃었습니다. 빚쟁이들은 그를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포기한 음악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가 하나 찾아왔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부자였습니다. 이름이 [찰스 제닌스]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여보게 인생을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자네, 이것을 읽어보고 다시 한번 작곡을 해보게."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말하기를 "이 말씀의 주인이 자네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가 있을 것이네" 그는 말씀 속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우신 분에 대한 것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24일간 침식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작곡에 몰두했습니다. 24일 후에 역사에 빛나는 불후의 명작이 탄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헨델의 메시야"입니다.

헨델의 메시야의 첫머리 부분은 이사야 40장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는 위로자로 오시는 메시야입니다. 그는 위로자입니다. 우리의 죄악의 상처를 싸매시고 치유하시며, 정다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하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막연히 우리 죄만 대신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모든 아픔을 공감하시고, 우리의 눈물과 한숨과 고독과 불안과 절망을 이해하신다는 주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그는 행복한 아기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 아기는 말구유에 탄생하신 아기입니다. 태어나자마자 헤롯의 살육의 칼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나자마자 도망을 시작합니다. 그는 인생을 고통으로 시작해서 고통으로 마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분의 삶이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저와 여러분을 이해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기를 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이중부정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도우시는 그분,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오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가 "고통"을 받으셨기에 내 고통을 아십니다. 그가 "낙심"을 경험하셨기에 내 낙심을 아십니다. 그가 "절망"해 보셨기에 내 절망을 이해하십니다. 그가 "오해"를 받으셨기에 우리의 오해를 이해하십니다. 그가 "슬픔"을 당하셨기에 내 슬픔을 아십니다. 그가 "배반"을 당하셨기에 배반의 쓰라림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도와줄 수 있으신 참된 위로자, 상담자, 지혜자가 되십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들 모두는 한 아기로 오신 하나님,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 상담자이신 그 분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만드신 분, 내 육체도, 내 지혜도, 내 영혼도 만드신 그분, 그분이 못 고칠 질병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이 해결 못할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이 모르는 "아픔도, 고통도, 좌절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고칠 수가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이 분을 만나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상처를 그분 앞에 내놓고, 해결 받으시고, 고침 받으시고. 위로를 받으시고.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옛날 이사야가 살았던 이스라엘과 유대나라의 형편이 비슷했습니다. 그 시대의 지도자 아하스를 비롯한 모든 지도자들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두 단어는 "부패""무능"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패했고, 무능했습니다. 나라의 운명은 외세에 의해 침몰 당하는 풍전등화 같은 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사치와 허영 속에서 쾌락을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부패한 지도자들, 무능한 지도자들,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역사적 상황과 그렇게도 유사할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자포자기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절망의 수렁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사야는 등장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그러나 여러분 위로를 받으십시오."

그 위로는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께서 한 지도자를 역사 속에 보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도자는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역사 속에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질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인격의 탁월성과 그분의 존재의 신비스러움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는 통치자, 그는 기묘자, 그 이름은 모사라. 이사야의 예언은 계속됩니다.

 

4.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아기의 존재는 전능하신 하나님(Might God)이라, 그는 본래 하나님이신데, 아기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이 표현은 모사라는 말 뒤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혜자, 상담자이신 그리스도라는 표현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는 표현입니다.

지혜가 없는 능력은 위험한 폭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지혜는 무가치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상담자가 많습니다. 요즘은 전문 상담가들이 많습니다. 상담학이라는 학문도 무척 발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서, 상담학은 그 한계를 느끼고, 상담의 가치를 재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왜 그럴까요? 상담의 지혜는 발달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문제는 "내담자"의 안타까운 문제나 어려움을 상담자가 짊어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상담학에서는 그런 문제를 짊어지지도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역전이 현상"의 위험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상담자가 내담자의 문제를 짊어지다 보면 오히려 상담자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상담의 한계입니다.

남의 문제를 짊어지는데 까지 나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상담자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돕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의 아픔을 같이 느끼시고, 함께 고통을 경험하실 뿐만 아니라 이런 고통스런 환경, 이런 아픔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가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안식으로 초청하십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벧전 5:7 너희 모든 염려를 내게 맡기라 이는 그가 너를 권고하심이라.

 

이 분은 여러분과 저를 도울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의 절정인 사 53장에 보시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담당하신 분" 이라고 주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짐을 같이 지시고,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시고, 같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 ". 기볼" 기볼이라는 말은 원래 "전쟁터에서 꼼짝없이 졌는데 갑자기 나를 대신해서 싸워주실 전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갈 길을 열어주시고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분" 이란 뜻입니다. 엘 기볼. 능력있는 전사, 내 삶속에 들어와 내 환경도, 내 상황도 바꾸시고,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 전능하신 하나님, 엘 기볼!

 

5.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이십니다.

 

이 말씀은 아기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부성적 역할"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와 같으신 분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입니다.

63:16에서 이사야는 말하기를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은 구속자가 되셨나이다"

구속자가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로버트 맥기라는 심리학자의 문제작 가운데 ‘Father Hunger’책이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굶주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굶주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아버지, 넓으신 아버지, 든든한 아버지, 내가 기댈 수 있는 아버지, 내 상처를 싸매어 줄 수 있는 아버지, 나를 보살펴 주시는 완전한 아버지에 대한 갈증과 굶주림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로버트 맥기는 Father Hunger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는 이런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대안을 찾습니다. 대리만족을 찾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지도자를 찾거나, 종교적인 지도자를 찾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들의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십니다. 그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들과 함께 걸어주십니다. 그들의 갈길을 인도하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들의 희망, 피난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 14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이제는 너희를 떠나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충격 이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급히 묻습니다. "선생님 어디로 가십니까?" "쿼바디스도미네"그래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요 14장이 열립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그 집을 예비하러 간다. 그때 갑자기 그 장면 속에서 빌립이란 제자가 뚝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선생님 아버지를 한번만 보여주시면 한이 없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리스도가 아버지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의 근본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고, 함께 울어주시고, 동행하시고, 말씀해 주시고, 내 인생을 완전히 보호해 주시는 아버지, 그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오늘만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영존하시는 아버지" Everlasting Father. 아기로 태어나신 그분,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그분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믿고 있는 그리스도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아버지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6. 평강의 왕이라

 

이 아기는 보통아기가 아니라 평강의 왕으로 오신 아기이십니다. 왕이란 고대사회의 image는 강력한 힘, 그리고 잔인한 힘으로 민중들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독재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는 왕은 왕인데 "평강의 왕" 이십니다. Prince of Peace.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입니다. UN이 있고 APEC 이 있고 ASEM 이 있고 G7 이 있지만 분쟁과 전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분은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기에게 위협감을 느낄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평화로운 아기, 아름답게 잠들어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이십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왕이십니다. 돈있는 사람도, 돈없는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힘있는 사람도, 힘없는 사람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평화를 가져오신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을 찬양하던 천군천사들은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그분의 은혜를 알고,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분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의 평화로다" 제자들과 같이 하시고, “가르치시고훈련하시고 3년 후에 제자들을 떠나시게 되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겨 주셨던 가장 소중한 선물 그것은 "주의 평화"였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이 평안은 상대적인 평안이 아니라 주관적인 평안이 아니라 이 평안은 하나님의 평안, 이 평안은 너희에게 남기노라.

 

결론

1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때에 미군 해병대가 참호에서 적과 처참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공격하라는 명령에 총알이 빗발치듯한 전장에서 격렬하게 싸우다 퇴각하라는 명령으로 모두가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병사는 옆에 있던 전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그는 피를 흘리며 참호 밖 멀리에 있는 전우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전우를 구하러 가겠다고 하였지만 안돼라는 부대장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부대장의 명령을 어기고 전우에게고 다가갔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는 전우를 데리고 오는 동안 전우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부대장은 화가 났습니다. 자신의 부하가 명령불복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나?” “당연합니다. 친구의 마지막 말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자네의 생명을 걸만큼 가치 있었나?” “, 친구의 마지막 말은 생명을 걸만큼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길래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 친구의 마지막 말은 자네가 와줄 줄 알았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걸만큼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오셨습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적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이 땅에 오실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분을 보내실 줄을 알았습니다. 오늘 그 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그 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가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주님이 강림하셨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어느 때까지 기다릴까요?”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기다리던 메시야는 생명을 걸만큼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아들을 맞이하여 생명을 얻는 은혜와 기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주님과 더불어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우리 모두의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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