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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강론 9:9-10:4) 그럴지라도
음두진 2020-01-15 추천 0 댓글 0 조회 730

그럴지라도/ 이사야 9:8~10:4    

 

 

커다란 항아리에 조화와 생화가 같이 꽂혀 있었습니다. 조화는 자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화는 항아리의 물이 말라가면서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조화는 이런 생화를 보면서 비웃었습니다.

너는 내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어. 네 뿌리가 무슨 소용이 있니?”

그러던 어느 날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생화는 비를 맞으며 아름답게 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그러나 조화는 비를 맞을수록 험상궂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주인은 조화를 뽑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악한 이가 더욱더 번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화인생과 생화인생이 갈라질 때가 반드시 옵니다. 솔로몬은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10;30)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예언을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6-7ab)고 해놓고서 곧바로 다시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메시지의 방향을 북왕국 이스라엘 쪽으로 향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럴만큼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은총과 너무나 멀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메시아의 극명한 대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까지 거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멸망의 예언을 이루게하는 도구에 불과하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죄 아래로 너무 깊이 빠졌고, 그만큼 다시 돌아오기에는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입니다.

이들의 죄를 보면 가나안을 바로 앞에 두고서 광야에서 쓰러져 간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스릅니다. 이 역풍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풀어 가시는지 그 해법을 찾아봅시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적절하게 응징하셨지만 '그럴지라도' "주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9:12b, 17b, 21b, 10:4). 어쩌면 20년이 넘게 남왕국 유다를 향해 외쳐지는 심판의 메시지를 북왕국 이스라엘도 직간접으로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잘못한 두 아들을 야단치기 위해 먼저 큰 아이를 혼내고 있으면 작은 아이는 얼른 눈치를 채고서 정신을 차려야 옳은데 수십 년이 넘게 유다가 하나님께 야단맞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 민족들은 어느 것 하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시야에 들어온 죄목들만 보아도 하나님이 여태껏 기다려 주신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럴지라도 (9:8-12)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께서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였은즉."(8), 그래서 모두가 "모든 백성이 알 것이거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9) 벽돌이 무너졌으면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으면 되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뭘 하셔도 자신들은 다시 대용품을 찾아 "쌓고 대신하리라."(10)하며 건방을 떨었습니다. 할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습니다. () 큰 이스라엘 아닙니까?

 

결국 여호와 하나님은 르신(아람)이라는 대적을 일으켜서 아람을 윗맷돌로, 블레셋을 아래맷돌로 사용하사 이스라엘을 맷돌 구멍에 삼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 그런데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했을지라도 진노를 거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갑작스럽게, 아무 이유 없이 집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준행치 않은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이 아닌 유사품과 대용품을 찾아 이를 의지하며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다듬은 돌''백향목'이 있다는 것, 무너지고 찍히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서슴지 않는 이스라엘, 결국 말씀을 떠나면 교만으로 향하고, 그렇게 되면 심판으로 추락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아닌 유한한 세상 세력들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고 위험한 불장난인가를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②③ 그럴지라도(9:13-21)

심판 이후에 하나님은 '그럴지라도'이심에도 이스라엘은 아직 '오히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않았습니다."(13). 그러니까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신호를 보내셨는데도 모르는 척했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들의 몰골을 비춰볼 그런 영적 실력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마침내 심판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처럼 온 이스라엘을 강타했습니다.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장로에서부터 젊은이와 고아와 과부에 이르기까지 멸망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은 중지되었습니다.

지도자의 잘못은 온 유다가 심판의 미궁으로 끝없이 추락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16).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가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는 어리석은 말만 했습니다”(17a)

 

참으로 악행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고, 이 불길은 온 유다를 태우고 있습니다(18).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을 땔감 삼아 저들과 저들의 죄악을 불태우십니다(19-21). "사람이 그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19b)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함께 망하는 것, 그리고 그 마지막은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21b)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어느 누구도 피하거나 막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은 '백향목'(10)으로 대신해 놓은 것도 다 불에 타 없어지고 말 것인데 인생이라는 게 인간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그렇게도 피하려고만 하면서 살아보겠다고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럴지라도(10:1-4)

 

지도자들의 죄는 좀 더 구체적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가 선언됩니다. 불의한 법을 제정하고 공포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에게 심판의 화살이 날아듭니다. 하나님마저도 불쌍히 여기시며 보호하시는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의 것을 토색하고 약탈하고 불공정하게 판결하고 처리했으니 '벌하시는 날''멀리서 오는 환난의 때'(3)를 결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도자들의 부정축재(不正蓄財)는 오늘의 일만은 아닙니다(3b). 불의한 재물이 결국 슬피 울며 떠나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선지자의 외침을 쉽게 읽고만 넘어가면 안됩니다. 이것이 자기 생명을 결코 지켜주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4a).

 

그런데가난한 백성'(10:2)이라는 말이 귀에 번쩍 뜨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지셨기에 도대체 이 모양 요 꼴의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백성'이라 하신다는 말인가? 내 마음 같아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이들처럼 바닥없는 심연 아래로 끝 모르고 추락하고 있을 때, 좀 쉽게 말해서 만약 내가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내 백성'이라 부르시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신다면......

결코 나에게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렇듯 나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여전히 냉정하고 싶어하는 나의 좁은 마음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심판하고 계시지만 아직 '남은 자'의 보이지 않는 행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희망의 불씨는 이미 18~9"겨우 남았도다.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다면”(8-9)에서 희미하게나마 보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판과 메시아 예언 사이에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해주시니 고난 속에서도 그나마 회복의 가능성을 가져 보는 것입니다.

 

일단 '그럴지라도' 접속곡(medley)은 네 번 반복되는 것으로 중단됩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지만 어떻든 비록 손을 들고 계실지라도 북왕국에 대한 진노는 이쯤해서 일단락됩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설마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하게 하실까? 설마 나에게는 이런 일이 없겠지? 잇다하더라도 또 기회를 주시겠지?라고 생각하고 말씀이 전혀 특별한 것도 아니라고,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이스라엘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늑대소년이야기]처럼 선지자는 언제나 하는 소리고,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산다는 식으러 살면 정말 안됩니다.

이것은 현대인에게 가장 교묘하게 발견되는 아주 악질적인 신앙의 버릇입니다. 이러한 영적 매너리즘(mannerism)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이제는 어떤 특별하고 자극적인 처방이 아니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경도 어느 정도 알고, 믿음생활도 익숙한 옷이 되어 있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의무에도 크게 모자람이 없고, 그러면서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교회적인 신앙, 목회자의 돌봄과 섬김 없이 '나 홀로 집에서스스로 생존하는 목회적 삶,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며 사는 공동체적 자세, 이처럼 살아도 그렇게 불편해 하지 않은 이상한 바벨탑을 쌓고 살아갑니다.

지금 이사야의 청중들이 그렇습니다. 또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성전과 제사와 안식일과 절기(1:11-14), 제사장과 선지자(8:2, 9:15), 율법,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흥망성쇠(興亡盛衰)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여호와를 찾는 것을 거부합니다(13). 온 몸이 병들어 만신창이(滿身瘡痍, 14-17)가 되었음에도 말입니다.

이사야의 설교를 듣는 게 불편하고 부담스럽다면 난 이미 하나님의 말씀도 내 방식대로만, 내 입맛에 맞는 것으로만, 하나님과 말씀까지도 그 주도권을 내가 잡고 살아가는 소망 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겁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무시합니다. 모든 것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헛된 자만심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실제적인 심판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어떠합니까?

 

1.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대적합니다. 결국 이들의 꾀는 철저히 무너지고 완전히 망할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됩니다. 죄는 마음을 팍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듭니다. 또한 그 마음을 담대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심판도 얼마든지 감당할 것 같은 근거없는 자만심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고통으로 오지 않습니다. 철저한 멸망과 고통만이 주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할 만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이 있기 전에는 그처럼 자신만만하던 사람도 하나님의 가벼운 책망 앞에서 곧바로 쓰러져서 울부짖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무너질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동족상잔의 극단적인 비극을 맛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도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서운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삶에 어떤 위기가 있습니까? 그것을 무조건 나의 힘과 세상적인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아래보다는 이 사건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삶이나 허물 그리고 죄악을 고백하며 성결한 심령을 회복해야합니다. 우리가 삶의 위기 앞에서 성결한 마음을 준비할 때, 하나님은 그 문제를 감당할 수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놀라운 기적으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에 악한 고집을 부리다가 더욱 문제를 어렵게 만듭니다. 어떠한 문제든지 근본적인 해결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악한 마음과 교만한 자를 철저히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예언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시대 형편으로 관심을 돌립니다. 북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데그들이 하나님께 회개치 아니하면 갑자기 멸망당할 것이며 고아와 과부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철저한 심판에 관한 것이며또한 유다와 이스라엘이 서로 악을 품고 동족상쟁을 벌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까? 그들의 완악함과 교만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자신들이 대단한 것처럼 과신하였고,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교만은 하나님보다도 자신을 과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찾기보다도 자신의 자랑거리나 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시며 심판의 불을 쏟으십니다. 교만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악을 행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메시아의 은혜와 사랑도 외면하기 때문에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악한 미음과 교만의 요소를 회개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찾으며 메시아의 다스리심을 받아야 합니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의 두려움이 당신의 성결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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