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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강론) 13:6~16 지금 당장 버려야 할 것
음두진 2020-02-28 추천 0 댓글 0 조회 853

이사야 13:6-16/ 지금 버려야 할 것-교만

 

우리가 살면서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멸망입니다. 세상의 멸망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다라는 것은 도저히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멸망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무엇을 보고 사십니까? 자녀? 친구? 부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요?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며 살아야 할 까요? 인생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즉 지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관심이 현재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자가 살아남느냐(survival)가 관심거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마지막 심판 때에 살아남는 사람이 되려면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정말 버려서 마지막 때 살아남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본문은 바벨론이라는 나라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은 이사야 선지자 당시에 최강의 제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해온 유다마저도 단번에 멸망시켰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었고, 거칠 것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아주 담대하게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할 것을 외쳤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친히 세상의 나라를 움직이시며 또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바벨론은 얼마가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 대적하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에 대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이기주의와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물질주의, 그리고 당장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쾌락주의 등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영광을 구하고 또 하나님을 무시하며 때로는 대적하는 악한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이런 것을 얼마나 사모하며 추구하고 삽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조차도 이러한 것을 쫓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좋게 보이고 또 든든하게 보여도 결국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가증한 것이요, 어느 한 날에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그 도구로 사용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벨론을 다시 심판해 버리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벨론이 왜 심판을 받아야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심판받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말입니다.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가 있다면 그 죄는 바로 우리가 심판을 받아야 할 죄와 같습니다. 인간의 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죄는 변하지 않고 내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죄를 알면 사단이 사람들을 어떻게 유혹하는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만, 거만

먼저 11절을 보면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바벨론이라는 한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바벨론의 죄가 곧 온 세상의 죄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을 들어서 세상의 죄와 심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죄를 말합니까? 11절은 바벨론의 오만과 거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만, 오만, 거만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표현을 이렇게 각각 사용하는 것은 바벨론의 죄가 어떤 것임을 강하게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의 오만...강포한 자의 거만-본문은 '그중에서 죄인을 멸한다'9절 말씀의 확대, 부연 설명입니다. 세상은 그 죄로 인해 멸망당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입니다. 그 모든 죄 가운데 선지자는 교만의 죄를 으뜸으로 꼽는다. '교만한 자', '강포한 자'는 사악한 세상의 군주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히 '강포한 자'로 번역된 '아리침'은 단순히 군주를 뜻하는 '네디빔'(2)과는 달리 무섭고 잔인한 폭군을 가리킵니다.

 

1:1절에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이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를 말하는데 이것은 각각 다른 세 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의미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악인이 곧 죄인이고 죄인이 곧 오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오만한 자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것이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오만을 얼마나 비중 있게 말씀하시느냐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만은 곧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만이나 교만이라는 것을 세상적인 상식과 시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은 세상이 생각하는 교만과 다릅니다. 만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만과 겸손이라는 것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이해해 버리면 세상에서도 겸손한 자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지막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것이 교만 때문이라면 세상에서도 겸손한 자는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과 교만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겸손은 잘난 척 안하는 사람입니다. 남보다 많이 배웠다고 거들먹거리지 않고 권세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교만과 겸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벨론의 교만을 알기 위해서 단 4:30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발전을 바라보면서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였다고 하면서 자기의 힘과 능력에 대해서 자랑을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오기를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너는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실제로 그것을 겪으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늘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계시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이 자기 뜻대로 행하셔서 바벨론이 부강하게 되었는데 자신은 그것을 자기의 힘으로 된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교만하게 행하는 자기를 낮추셨다'고 말합니다. 즉 느부갓네살은 위에서 자기 뜻대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교만이란 자기에게 있는 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힘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을 부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즉 교만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내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라고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은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십니까?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보다 세상을 의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세상 것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세상을 사는 것도 하나님의 힘이지만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힘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언제나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합니다. 이런 신자가 바로 복된 자입니다.

 

바벨론이 교만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절은 바벨론이 평소에 사랑했던 것들을 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자녀(어린 아이들), , 아내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들을 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장애물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마지막 때를 사는 신자가 할 일은 그것을 부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입니다.

 

교만에 대한 심판-멸망

교만한 바벨론을 멸망시킨 나라는 메대라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작은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메대라는 작은 나라에 의해서 멸망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약한 자를 통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보여줍니다.

당시 메대라는 나라는 오지에 사는 작은 민족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이 이렇게 큰일을 해 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는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고 이 나라가 바벨론을 멸망시키는데 앞장 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실현이 되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역사 섭리는 약한 자를 통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너무나 부족합니까? 주께서 나에게 명하는 일이 나의 자질과 능력에 비해서 너무나 크고 웅장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나의 인간적인 능력과 지혜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미약한 나라 메대가 최강의 국가 바벨론을 멸망시키는데 앞장 설줄 누가 감히 생각하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꾼에게 비전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 자에게 그 일에 필요한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식하는 자를 그의 일꾼으로 쓰시고 그의 역사를 친히 이루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이니라”.(고전 4: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주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이나 한계에 부딪힌 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겸손하면 됩니다. 서지도 못한 것이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집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이 별난 줄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요, 이런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약한 사람에게 멸망당합니다.

 

세상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막강한 앗수르를 멸망시킨 신바벨론 제국이 망할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은 최대의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며 세계 어디서나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00년도 되지 않아서 바벨론은 메대 바사에게 멸망하여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메대는 앗수르로부터 도망을 다니다가 민족 통일과 국가 독립을 이루게 되었는데, 앗수르를 이어받은 바벨론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재물의 약탈보다도 그들에게 보복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었습니다.

16절을 보면, 메데 사람들은 보라 은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금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메대 사람을 내가 충동하여 바벨론을 치게 하고, 활로 청년을 쏘아 죽이며, 태의 열매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아이를 애석하게 보지 않는다고 언급하면서 바벨론의 재물을 약탈함이 아니라 복수가 목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잔인한 방법으로 바벨론을 소돔과 고모라같이 멸망시키며 더 이상 거주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파괴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메대 바사가 바벨론을 멸망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기 위해서 메대와 바사를 징벌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진정한 주관자는 정치 지도자, 권력가나 재력가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나라나 개인을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도구로 쓰임을 받도록 준비되어야하고, 쓰임 받은 후에도 거만해지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악과 교만을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자신들의 힘만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강포를 일삼았습니다. 그들의 악과 교만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포악을 행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포로로 끌어갔으며 예루살렘 성읍을 파괴하고 성전을 불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기구들을 빼앗아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바쳤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쉽게 멸망시킨 것은 그들의 군사력보다도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도구였기에 가능한 것인데, 그들의 교만은 하나님을 모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철저히 심판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악과 교만이 가득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인구는 금보다 희귀하게 되고 잔인한 살육을 당하게 되고, 어린 아이조차 메어침을 당하게 되고 아내들은 욕보임을 당해 되고, 완전히 폐허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멸하시고 교만한 자를 철저히 낮추는 분이십니다. 유리는 죄를 멀리하며,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자랑하며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의 끔찍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말세야, 말세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을 통해서 그리고 아브라함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고 인간적인 영광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 겸손히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어떤 의지로도 감당해 낼 수 없는 무서움이 그 특징입니다. 이날의 고통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저 그날의 경고를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하게 사는 것이 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삶의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 행하기 -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고 겸손하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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