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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강론) 14:12-20 지켜야 할 자리
음두진 2020-03-12 추천 0 댓글 0 조회 892

20) 14:1220/ 지켜야 할 내 자리 / 주일

 

거리에 나가면 약도가 있습니다. 길을 찾을 때 여러분들은 지도에 무엇부터 찾나요? 당신이 가장 먼저 주시해야 할 것은‘you are here'라고 쓰인 현재 위치입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각 건물의 위치를 표시해놓았더라도, 지금 여기에 나의 좌표를 알려주지 않으면 지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출발지로서, 현재 위치가 없는 지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I am here'를 찾지 못하면 목표도 실행계획도 무의미합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의 영적 상태와 위치를 알아야합니다. 나는 생명의 좁은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멸망의 넓은 길로 가고 있는가?

자기 위치를 잘 파악하고 움직이는 사람을 사람들이 철이 들었다고 말하고,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로마서 12:3에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위치를 적당한 곳에 확정시키면서 책임을 완수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위치를 떠난 것이 죄입니다. 아담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숲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위치를 물으셨습니다. 아담에게 네 위치가 부적합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엉뚱하게도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말햇습니다. 그냥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되는 것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동문서답을 한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자기 제물이 열납되지 않고 동생의 제물만 하나님이 열납하심으로 분하여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벨의 위치를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가인은 동생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였습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가인은 하나님의 물음에 정면으로 대결하였습니다. 형의 위치는 아우를 죽이는 위치가 아니라 아우를 보호하는 위치입니다. 가인은 이웃에 대한 자기의 책임을 잊어버렸습니다. 나 때문에 형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을 회개하고 자복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덮으려고 친구, 이웃, 형제들을 분노하여 죽인 일은 없습니까?

모압왕 발락이 뇌물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람에게 왔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명예와 물질의 탐욕에 끌려 모압으로 갔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자기의 자리를 이탈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발람을 성경은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선지자"(12:4) 라고 평가했습니다.

본문 이사야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루시퍼, Lucifer)/ (=열국을 엎은 자)’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말뜻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입니다. 이것을 현대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당시 세계를 정복하고 절대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군림한 바벨론 왕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교부들(Tertullian, Origen)은 교만한 천사가 하나님의 보좌를 탐하다가 쫓겨난 사탄의 원조라고도 해석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침의 아들 계명성(=루시퍼)은 교만한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여 하나님에게 심판 받은 존재를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중들어야 하는 천사가,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 하나님과 동등하게 서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을 섬겨야 할 지도자들과 백성 위에 군림하는 바벨론의 왕을 일컫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음으로 자기의 위치를 바르게 세워나아 갈 수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기를 절대화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자기를 절대화시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무너뜨리십니다. 인간이 세운 모든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지고 맙니다. 정치도 무너지고 경제도 무너지고, 기술과 과학도 무너지고, 문화와 종교도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주 만물을 지배해야 할 사람의 위치를 떠난 아담은 낙원을 빼앗기고 땀흘리며 흙을 파서 먹으며 살다가 허무하게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웃을 바르게 서지 못하게 하고 동생의 위치를 무너뜨린 가인은 유리하는 자가 되어 떠돌아다니다가 개처럼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 있어야 할 선지자가 위치를 떠나 모압 진영에 있던 발람은 자기 민족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위치를 떠난 아침의 계명성 "루시퍼"는 음부 구덩이의 맨 밑에 빠져 멸망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위치를 찾아서 꿋꿋하게 나아갔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의 결행을 반대하자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기적을 본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나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자 몸을 피하셨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여기서 빨리 떠나라는 정보를 전하자,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에도 내가 갈 길을 가야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13:32)".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로써 자기의 위치를 확정하시고 담대히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현대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Bonhoeffer)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 위치를 확정해 주신다고 주장했습니다. 국가에서의 나의 책임, 가정에서의 나의 책임, 교회에서의 나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위치를 확정하고 책임있게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위치를 확정하고 자기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나의 위치를 이탈하지 말고, 목숨을 다하여 위치를 구축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이웃을 외면하지도 말고, 선한 사마리아와 사람과 같이 고난당하는 이웃의 부름에 응답하십시오.

책임보다 더 우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의 부름이 있을 때 과감하게 나의 1차적 책임을 유보하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해야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의 1차적인 책임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부름에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가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생명을 구원하는 일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우선한 율법주의입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선언한 말씀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픔인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의 얼굴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믿음의 시각이 열린 자는 이웃의 고난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자리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리를 놓고 볼 때 세 종류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는 그 자리에 있으나 마나한 사람입니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 있으나마한 사람 그것이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는 유재가치와 존재의미가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다. 그는 자리를 해치고 자리를 욕되게 하고 자리를 망치는 자입니다. 그는 남의 지탄을 받고 사람들의 멸시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그런 인물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는 그 자리에 꼭 있어야할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는 자리를 빛나게 하고 자리를 영광되게 합니다. 그는 남들의 존경을 받고 세인의 칭송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번영하고 국가는 부강해집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자리는 인생에서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있어야 할 것이 제 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데 있는 경우를 생각해 적 있습니까?

설렁탕이 설렁탕 그릇에 있지 않고 비닐 종이에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호박죽이 호박죽 그릇에 있지 않고 변기에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감자가 감자밭에 있지 않고 고추밭에 있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달리는 차가 차로에 있지 않고 밖에 있으면 죽음을 불러올 수습니다. 만물은 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고 편한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땅히 있어야 할 말씀과 기도의 자리, 헌신의 자리에 있어야 빛이 납니다.

소년 예수님을 잃고 어머니 마리아가 동분서주하며 찾다 성전에서 만나 불평하니 어린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2:49)라고 되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되 영생 얻은 자녀로 성별하시고 예수님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가지 된 자리에서 원줄기 포도나무에 붙어 열매를 많이 맺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자리에 있지 않을 때 네가 어디 있느냐”(3:9)며 찾으십니다.

“Dirty is out of the pl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러움이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연못 속에서 커다란 고기가 헤엄칠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가 우리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면 우리는 더럽다고 말합니다. 아름답던 물고기가 혐오스러워지는 것은 그 물고기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 있기 때문입니다. 논밭에서는 꼭 필요한 흙이 방바닥에서는 닦아내야 할 더러운 것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임의대로 버리고 떠날 수 없습니다.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은 견고함과 인내와 피나는 노력이 요구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은 제자리를 지키며 그 곳에서 충성스럽게 맡겨진 역할을 해낼 때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무엇인지 아셨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자리를 꼭 지켜서 잘햇다고, 믿음직스럽다고 주님께 칭찬듣는 좋은 일꾼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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