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이사야2:1-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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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산에오르고 성전에 이르는 사람
이사야 2:1~4
아이들은 설교할 때 자기들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이들과 이런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이번 여름방학에 해보고 싶은 것은 뭐니?” “잘 모르겠어요.”
“어떤 방향으로 공부하려고 하니?” “잘 모르겠어요.”
“너의 삶의 목적과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잘 모르겠어요.”
“희망이 뭐야?” “잘 모르겠어요.”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아이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많이 합니다.
‘왜 그럴까?’생각해보니 어려서부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배우고 싶은 것, 진로 등 거의 모든 것들을 엄마가 선택해 주었고, 자신들은 따라가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을 잘 못하고 망설이기 때문입니다.
성적이 우수한 어느 자립형 사립고 여학생이 “엄마, 이제 됐어?” 이런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엄마는 ‘경쟁에서 뒤지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딸아이를 학업으로 내몰았고, 자녀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뛰어난 성적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성적표 위에 “엄마, 이제 됐어?”라는 글을 적어놓고 극단적인 반항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슬픈 이야기입니다.
경쟁하면서 살아야 하는 아이들이 안쓰럽습니다. 그런데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경쟁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자녀들은 경쟁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부터 엄마들의 경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학교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다니는 것 같이 생각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경쟁의 대상입니다.
할머니가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갔습니다. 할머니가 찾을 금액을 본 은행원은 황당했습니다. 금액을 적는 곳에‘전부’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행원이 말하길, “할머니, 이렇게 쓰시면 안돼요. 액수를 써야지요.”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금액란을 고쳐서 다시 은행원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은행원은 더욱 황당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금액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싹 다!’
이 세상 ‘전부, 싹 다’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갈 것처럼 경쟁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이기면 우월감에 빠져서 교만해지고, 지면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비굴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경쟁에서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 태어났을까요?
저는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나야겠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남자 아이로 태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가난하고 힘든 시기에 태어날 생각도 없었습니다. 이름도 죽산 음씨 가문으로 태어나 ‘음두진’으로 지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그것도 보릿고개를 넘어가는 가난한 시기에 태어나 고생하며 컸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의지나 생각은 0.001%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왜 태어났습니까?”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니네 엄마 아빠가 어찌어찌 좋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는 너 자신을 하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지명하여 보냈으며, 너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너를 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사람으로 부르셨다. 목적이 이끌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적이 우리 인생의 목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1등 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경쟁해서 이겨 살아남기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서로를 향하여 창을 겨누고, 칼을 휘둘러서 이겨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일까요?
우리가 이전에 묵상했던 욥기를 보면 욥의 친구들의 욥의 아픈 소식을 듣고 병문안 옵니다. 위로하고 격려하는 병문안입니다. 하지만 와서 고난과 악의 관계에 대한 지식으로 경쟁하다가 병문안 목적은 까마득하게 잊고 싸우는 모습만 보여주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사는지 모릅니다. 목적은 그게 아닌데 어느 날 보니까 이기기 위해서 살고, 돈을 벌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경쟁합니다. 이겨야 주도권을 잡습니다. 아이들은 학교 다니면서 성적으로 이겨야 되고, 결혼하면 부부끼리도 주도권 경쟁을 벌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주도권 싸움이 치열합니다. 이스라엘은 이기려고 팔레스타인에 폭탄을 펑펑 쏘아댑니다. 그 포탄은 어린 아이들, 임산부들을 가리지 않고 쓰러뜨립니다. 천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반군은 날아가는 말레이시아 민항기를 격추시켜서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우리나라 주변국가들, 미국, 일본, 중국, 북한, 러시아 등은 세계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경쟁입니다. 주도권 싸움입니다. 싸워서 이겨야 삽니다.
이스라엘도 이런 국가가 되었습니다. 힘센 사람이 이기는 사회, 사회적인 약자들을 무시하는 사회, 이기기 위해서 악한 방법을 동원하고, 뇌물을 주고, 도적질을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를 보내서 말씀하십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도 살 수 있다”
4절,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칼을 쳐서 보습, 곧 농기구를 만듭니다. 창을 쳐서 낫을 만듭니다.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더 이상 경쟁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이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시기가 온다고 말합니다. 이런 나라를 평화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정말 이런 나라가 올까요? 인류 역사는 오히려 농부들의 농기구와 낫을 빼앗아 군인들의 칼과 창을 만들었습니다. 서로 죽기고 죽는 전쟁의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올까요?
운전기사가 길을 잘못 선택하면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길에서 헤매게 됩니다. 모두가 잘못됩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인생의 운전기사입니다. 운전기사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자녀들이 몸부림쳐도 올바른 방향을 선택하려고 해도 올바르게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쟁의 역사가 언제쯤이면 끝날 수 있을까요?
2절,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말일에’ 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이 모든 산꼭대기에 우뚝 서는 날, 경쟁의 역사는 끝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일’을 ‘말세, 마지막 날, 메시야의 날, 심판의 날...’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인 신약시대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세상의 생각으로 살다가 주님을 만나서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날’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옛사람으로 살다가 주님을 만나서 옛사람과 작별을 고하는 날’이 말일입니다.
한 아들이 자기 뜻대로 살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언제 죽어요? 빨리 죽지 않으려면 유산이라도 먼저 주세요.” 이런 아들은 불효자식입니다. 이런 불효자식이 돈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는 놈 위에 걷는 놈 있고, 걷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그 위를 올라타는 놈이 있었습니다. 결국 패배했습니다. 몸도 상했고, 마음도 상했습니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달려와서 아들을 붙들어 일으킵니다. “일어나라. 내가 죽었던 아들을 다시 얻었노라” 이 순간이 아들의 말세입니다. 내가 틀렸고, 아버지의 방법이 옳았음을 깨닫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산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날, 잘못 살아온 세상과 이별하고, 이제는 아버지의 품안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3절,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시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이런 결단을 시작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주님의 말씀이 길이라고, 안내자요, 나침판이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나라를 메시야 왕국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는 나라입니다.
신약시대 이후부터는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고, 이들이 모인 공동체를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교회는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에는 죽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방법대로만 살다가는 이 세상에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양다리 걸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경험했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세상을 따라가는 삶을 끝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심했다면 우리의 아이들에게 경쟁보다 협력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이 땅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가르쳐 주십시오. 서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함께 손을 잡고 붙들어 일으키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약한 자들과 나누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배워서 남 주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는 “너 잘되라고 공부하라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배워서 남을 주라’고 가르칩니다. 열심히 배워서 남을 주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경쟁하고, 싸워 이기기 위해 만들던 칼과 창을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고, 낫을 만들어 서로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속한 공동체부터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동화되기도 하고,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작년에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에볼라라는 강력한 전염병이 생겼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메르스라는 전염병 때문에 모두가 전염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세요? 이 전염병보다 더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는 바이러스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행복 바이러스, 사랑 바이러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행복과 사랑은 에볼라나 메르스가 끼치는 죽음의 전염성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사람을 살리는 바이러스입니다. 뭔가 거창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을 기뻐하는 행복한 삶만으로도 세상은 변화를 시작합니다. 누군가에게 그저 사랑의 미소를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이기려는 것이 아니야. 너와 손을 잡고 협력하며, 너를 사랑하려는 거야.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야” 하나님은 이러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에 나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자녀들이 변하고, 내가 변하면 교회들이 변하고, 내가 변하면 내 주변사람들이 변하고, 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 이런 자부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본문은 종말에 여호와의 말씀을 통한 영적회복과 부흥운동, 교만한 자에 대한 심판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의 통치를 통해서 임할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회복과 부흥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말씀을 배우며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될 때 변화됩니다. 이사야는 말일에 메시아의 통치로 변화될 세상을 예언하였습니다. 만방에서 모여 들어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메시아로부터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 되고,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의 세상이 될 것을 전하였습니다. 메시아의 통치로 말미암아 여러 종류의 전쟁무기로 각종 농기구를 만들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을 전했습니다. 메시아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평화의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게 되었습니다(행 2:9~11).
그러나 세계는 전쟁과 테러가 그치지 않고 있으며, 각 나라마다 더 강력한 전쟁무기를 만드는데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고 메시아의 통치를 받으면 세계평화가 이루어지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은 놀라운 변화와 부홍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상 끝날에는 전쟁과 테러가 없어질 것이며, 범죄와 부패와 불의가 사라질 것이며, 욕심과 이기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꺾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본래적인 특징 악하고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도 아주 교만한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높아져서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교만한 모습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세상 풍속을 따라가며 우상을 숭배합니다. 사치와 부와 군사력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걱정 없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교만을 꺾으십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도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시며, 견고한 성을 쌓았어도 모래성 무너뜨리듯 하시며,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숨을지라도 땅을 진동시키심으로 무너지게 하십니다.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살 길을 찾은 사람입니다. 호흡이 코에 있는 연약한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홀로 높고 위대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은 멸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놀라운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 입니다.
우리는 꿈을 꿉니다. 핵무기의 공포도 없고 재래전의 위험도 없는 세상을, 우리는 모든 군사비가 평화를 위해 쓰여, 탱크가 트랙터로 소총이 삽자루로 바뀔 날을 고대합니다. 국가 간의 갈등이 없고 계층 간의 이해관계가 상반되지도 않으며 모든 너와 내가 화평케 되는 사회에서 살아볼 것을 사모합니다. 입시 공부하듯이 성경을 공부하며, 부동산과 증권에 투기하는 열정이 주님의 사업에 도전하도 모험하는 일로 바뀌며, 영의 양식이 차고 넘쳐 모두들 해와 같이 밝은 표정을 짓는 진정으로 새 예루살렘이 건설될 것을 타는 목마름으로 열망합니다.
무엇으로 이 꿈이 이루어질 것인가? 꿈이 아닌 바로 이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해야 성취되는 것인가? 공산주의도 아니며 자본주의도 아닙니다. 제도의 점진적 개혁이나 혁명도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갖는 제한적 가치와 의미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 야곱 족속들에게 두신 뜻은 그들이 열방의 성경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인이 성경을 알고 성경대로 살 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신 뜻은 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두신 성경 선생의 소망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이스라엘이 된 바로 당신에게 두신 소망입니다.
*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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