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이사야1:10-20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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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 이사야 ② 1:10-20
* 제 목/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저는 5대째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저희 집안은 지금 현재 6대째 까지 예수 믿는 일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크게 바라고 기도하는 제목 중에 하나는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제 자손 중 한 사람도 예수 밖에 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저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목사이기 때문에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예수 믿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는 까닭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복이 많기 때문입니다. 살면 살수록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가가 마음에 새록새록 쌓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제가 가장 잘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나름대로는 참 열심히 그리고 진짜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복은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 단 하나를 말하라면 저는 단번에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복들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지만 이 복 만큼은 다른 복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죄 사함입니다.
시편 32편 1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허물의 사하심을 받고 죄의 가림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저는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최고의 복은 죄 사함의 복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1984년도에 용인에 땅을 샀답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주신 집을 팔아 산 땅이었습니다. 사택 생활을 하여야 했던 목사님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자기 집을 남에게 세로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집을 관리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형편을 잘 아시는 분이 도와 주셔서 그 집을 팔아 용인에 땅을 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잔금을 치루고 그 땅을 등기하려고 했을 때, 그 땅을 등기하려면 자신의 주민등록이 그 땅으로 옮겨져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주신 분에게 여쭈었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제 주민등록만 잠시 그곳으로 옮겼다가 등기를 마친 후 다시 오면 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여 아무 문제없이 그 땅의 등기를 마칠 수 있었답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여성으로 복지부 장관이 되었던 분이 땅 문제로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옷을 벗는 것을 보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그것을 위장전입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만 보니 자기가 한 일과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자신이 한 일이 위장전입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후회스럽고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들 수 없었답니다.
당시는 주민등록 등초본을 손으로 써서 관리할 때였습니다. 때문에 세대주로 제일 위에 적혀져 있던 자신의 이름은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서 두 줄로 죽죽 그러져 있고 그 옆에 몇 년 몇 월 며칠에 용인군 어디 어디로 주민등록을 옮겼다는 기록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땅 등기 후 다시 주민등록을 옮겨왔을 때 자신의 이름은 맨 밑에 다시 기록되었습니다. 그 주민등록만 떼보면 제가 위장전입 한 놈이라는 것이 그냥 그대로 노출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담임목사였던 관계로 교회 일로 주민등록 등초본을 제출해야 하는 일이 가끔씩, 아니 자주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교회에 제출할 때마다 정말 조금만 과장하면 죽고 싶으리만큼 힘들었습니다.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 평생을 따라 다녀야 할 수치였습니다. 그 수치가 주민등록을 뗄 때마다 드러나야만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다시 교회의 일로 주민등록을 떼다가 놀라운 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민등록을 컴퓨터로 정리하면서 보기 싫게 죽죽 그어져 있던 것이 없어지고 이름이 원래대로 맨 위에 올라가 아주 깨끗해 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 기록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냥 겉으로만 으로도 깨끗해 진 주민등록이 자신을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몰랐답니다.
우리에게는 그 위장전입처럼 내 평생을 따라다닐 죄가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많습니다. 저도 살면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들을 제법 격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격은 일 중에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죄의 문제였습니다. 제게 죄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한 번 지은 죄는 정말 거머리 같아서 어떤 방법으로든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그것이 가장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외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의 종교 행위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요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같은 외식을 크게 책망하십니다.
이사야서뿐 아니라 구약의 여기저기서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예수님도 교인의 외식을 가장 큰 죄악으로 간주했습니다.
그 사회의 부패는 종교의 책임입니다. 한 사회의 윤리는 정치 집단이나, 학자들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이 지켜야합니다.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타락하자 그 사회의 부패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패상을 보면서 과연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사회적 부패상은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는 이들을 향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추악한 죄를 말갛게 씻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죄인들이 피 묻은 손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기를 바라는 것 이며 나오기만 하면 온갖 축복을 즐겨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맨 먼저 가야할 곳이 바로 하나님 앞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분수에 넘치는 주님의 초대를 감히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노와 분을 더 욱 부채질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패역한 백성들을 위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심판뿐입니다. 모든 불순물과 찌꺼기를 다 제하여 버리고, 모든 죄와 악을 불로 사르시고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을 친히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통한 새 역사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원하시지 않으시지만 인간의 고의적인 반역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린 심판의 외침 가운데서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심판이 구원의 길이 됩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5대째 예수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지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저는 교회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저는 교회 다니는 것을 좋아하여서 정말 평생 한 번도 교회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믿음과 복음 보다는 그냥 교회 다니는 것이 좋아서 교회를 다니는 생활이 꽤 오랬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핵심은 죄 사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에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 사함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죄 사함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해도 들어갈 수 있고 장애가 있어도 들어갈 수 있고 세상적인 신분이 낮고 천해도 들어갈 수 있지만, 죄를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구원의 치명적인 장애는 우리의 죄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로 데려 가시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라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속죄는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는 완벽하게 씻기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장 전입한 주민등록은 겉만 깨끗해졌지만, 제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겉만 깨끗해 진 것이 아니라 진짜로 깨끗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사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망쳐진 제 인생의 도화지를 다시 새것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죄는 완벽하여 흠이 없습니다. 흠이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죄는 완벽한 속죄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몇 사람의 예외가 있습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입니다. 이 네 여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허물이 많은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여자라는 것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를 해서 아들을 낳은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당시 기생보다 더 수치스러웠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본래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고사하고 제 족보에도 수치스러워서 올릴 수 없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그런 이름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다른 여자들의 이름은 빼면서도 그 여자들의 이름은 일부러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말과 라합과 룻과 밧세바의 수치와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들의 죄와 허물을 정말 완벽하게 사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잘못하면 야단을 치곤하였습니다. 때로는 매를 들 때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금방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하고 와서 매달리고 그랬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이들의 건강함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이가 잘못하여 야단을 쳤습니다. 뉘우치고 용서를 빌기에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훈계한 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나와서 놀지도 않고 밥도 먹지 않습니다. 이놈이 왜 그러는가를 보려고 방으로 갔더니 제 방에 앉아서 제 머리를 제 손으로 쥐어박으면서 ‘나는 나쁜 놈이야. 아버지는 나를 용서하셨지만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면 그 놈은 정말 나쁜 놈입니다. 세상에 아버지가 용서해 주었는데 자기가 뭐라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렇게 자신을 정죄한단 말입니까?
사탄의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 우리를 정죄합니다. 하나님의 속죄를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우리로 하여금 죄의 종으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기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뻔뻔해 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두꺼워 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셨다는 것을 믿으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는 그 십자가 앞에서 다 사하여 지고 하나님조차 기억하지 않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19860년 10월 13일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목사 안수를 앞두고 사탄이 제 양심을 통해 말을 했습니다. 제 죄를 기억나게 한 후 “너 같은 놈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냐고 물고 늘어졌습니다. 목사가 되면 평생을 목사라는 올무에 묶여 편안하게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속삭였습니다. 참 괴로웠습니다. 정말로 목사 안수를 받을 것인가 아닌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죄를 사탄과 나 말고 또 알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처럼 생각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목사가 되는 것을 기뻐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과 십자가의 보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위하여 목사가 되는 저를 기뻐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때문에 제가 목사가 되고 한 아내의 사랑받는 남편이 되고 자녀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아비가 된 것은 전혀 저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임을 압니다.
저는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그 마음을 압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한 그 마음도 압니다. 저도 제게 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가 십자가의 은혜 곧 속죄의 은혜임을 압니다. 그래서 저도 자랑한다면 저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를 외면하실 것이라고 속입니다. 우리를 이미 버리셨다고 속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아니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당시에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던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등 저들과 서슴없이 어울리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흉을 보던 바리새인들에게 당신을 의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듯 의인에게 당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당신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위장전입 정도는 공개적으로 털어 놓을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허물과 죄가 우리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평생을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죄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까닭은 우리를 부자 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출세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서입니다. 우리의 죄가 비록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희어지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탄은 사함 받은 죄에 대해서도 끝까지 가책을 느끼고 그 죄의 멍에를 메고 종처럼 살아가도록 우리를 속이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그와 같은 속임수에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얽어매고 있는 죄로부터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귀한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할 귀한 그릇들입니다. 그냥 밥이나 먹으면서 세상 재미나 보면서 살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귀한 일에 쓰임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예배만 드려서 무엇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값을 치루시고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생명을 낭비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무슨 진정한 예배가 되겠습니까? 십자가의 보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의 의미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값을 치루시고 주신 부활의 생명이니 그만큼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 십자가의 보람과 부활의 의미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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