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이사야 3:1~12/ 잘라내면 얻는 것
오늘 본문 역시 유다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며 그 장래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본문에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했던 것들이 결과적으로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 중에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자기의 이익을 따라 잘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즉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루에도 줄을 여러 번 바꿔서는 의리도 없고 체면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하고는 친구나 이웃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그로 인해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또 나도 이익을 따라 바꾸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순리, 진리, 의리를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특색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무엇입니까? 사랑, 겸손, 거룩,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신앙의 인격입니다.
여러분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실 때에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과의 신의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온갖 고통과 조롱을 다 받으시면 서도 십자가에서 인내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애급의 일들을 잊어 버렸고, 홍해의 일들과,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 일들을 잊어버린 정도 없고 의리도 없는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의지하는 자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 유대 백성들이 애급이나 광야에서는 하나님만 의지하더니 가나안에 들어와 안정이 되니까, 넉넉하게 사는 이웃의 이방인들을 부러워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며 의지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인내하시던 우리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어떻게 분노하셨습니까? 본문 (1절)에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은 제하여 버리시되 곧 모든 물질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 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 자를 그리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모두 잘라 버리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 두 가지를 제거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물질을 제하여 버리십니다(1).
여러분 ! 본문(1절)에 보면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물이라”고 했습니다.
‘제하다’는 말은 히/ “rWs(수르)”라는 말로 뜻은“빗나가다, 돌이키다, 떠나다, 제거하다, 끝내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00회 나온다. ‘제거하다, 끝내다'는 의미가 가장 일반적인 의미이다.
아사는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서 그를 페위시키고 제거하였습니다(대하 15:16, 한글개역, "폐하고"). 히스기야는 우상숭배의 장소와 제의대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왕하 18:4, 대하 30:14).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에게 영적인 해를 줄 것들 즉 이방신들(창 35:2), 모든 악(사 1:16), 포도주(삼상1:14), 거짓 행위(시 119:29), 거짓 예배(암 5:21-23)를 제거하거나 "버리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지혜롭게 행하는 길은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것”입니다(잠 3:7).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하여 버리시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물이라고 했습니다. 양식과 물은 사람이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제하여 버리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인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지리적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땅입니다. 하늘이 문을 열어 비를 내리지 않으면 물이 없어서 사막에 풀이 나지를 않아 양떼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되고 사람들도 먹을 물 때문에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므로 물을 제거해 버린다고 하는 것은 무서운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던 모든 양식과 물을 (물질) 제하여 버리실 때 되어 질 일들을 시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그 날에 그가 소리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로 백성의 통치자로 삼지 말라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에 사회제도는 양식과 의복이 많고 많은 양떼를 가진 자가 존경을 받고 지도자도 되는 사회제도인데 하나님께 모든 물질을 제하여 버리시게 되니까 모든 백성들이 가난하게 되어 지도자가 되기를 사양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 성경(애2:20)에 보면 역사적으로 그 예언을 따라 유다는 그 후 바벨론에게 침공을 당하게 되며 모든 양식과 의복과 양떼를 도륙 당하게 되고 또 가나안 땅에는 극심한 가뭄과 흉년이 들어서 모든 유다 백성들이 어려운 도탄에 빠지므로 울부짖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자존심이란 말은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털끝만한 자존심만 건드려도 크게 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쟁반에 받혀진 떡이 아니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라는 말들도 합니다.
사람에게 자존심이 있듯이 우리 하나님께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 자존심이 무얼까요?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로서의 자존심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천지를 창조하신 자로서 누구든지 그 창조자의 자존심에 도전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으시며 버려두지 않으시며 제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또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귀하게 여기며,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창조주의 자존심을 짓밟는 무서운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10계명의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 “내 앞에 나 외에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창조주의 자존심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은 사람들의 자존심과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사람의 자존심은 교만에서 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존심은 어떤 신과도 비교 될 수 없는 유일하신 창조주로서의 자존심이십니다.
여러분 !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게 침공을 당하고 가나안땅에 가뭄이 들며 어려움이 찾아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이방신과 이방인들이 가진 물질을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자존심에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능성과 하나님의 전지성을 무시하고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다른 것을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인생을 제하여 버리신다(2).
본문(2절)에 보면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 본문을 분류해 보면 하나님께서 제하여 버리시는 3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군사적 인물들입니다. 즉 용사와 전사와 오십부장은 군사적 인물들 입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 인물들입니다. 재판장과 선지자 그리고 장로와 귀인과 모사들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본문에 복술자와 요술자, 그리고 공교한 것을 만드는 장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옛날에도 오늘날과 같이 복술자나 요술자들이, 그리고 인기 있는 예술가들이 우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더 좋고, 더 인기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물질뿐 아니라 사람들 중에도 우상의 자리에 앉혀놓은 자들이 너무너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복술자의 말을 더 믿으려고 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기보다 연예인을 더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세상 노래를 더 듣기 좋아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고유한 문화나 예술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 문화나 예술의 주인공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하며, 사람들이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 모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4-5절)에 보면 “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며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제하여 버리시면 이 세상은 윤리도 도덕도 없는 혼란한 세상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을 고관의 자리에 앉히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 마디로 하나님보다 인생을 더 의지하거나 신뢰 하지 말라는 말씀 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하나님과의 신뢰가 변함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그를 책임져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립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말을 바꿔 타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신앙을 지키면 반드시 기쁜 날이 오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성도 여러분! 고급 음식점의 음식이 비싼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잘라낸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삭스핀”이라는 요리는 상어 지느러미로 만든 요리입니다. 상당히 비싼 고급요리입니다. 이 요리를 만들기 위해 상어 지느러미만 잘라내서 사용합니다. 그래서 비산 것입니다.
그러하듯 사명자의 삶도 잘라낸 것이 많을수록 향기롭습니다. 설교도 잘라낸 것이 많아서 짧아진 설교가 은혜롭습니다. 은혜로운 대표기도도 잘라낸 것이 많은 기도입니다. 행복한 부부가 많지 않은 이유는 배우자를 위하여 희생한 것이 없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높은뜻정의교회 오대식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깊이 생각하게 하는 예화를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일본에서 목회하실 때, 한 교회로부터 청함을 받아 설교를 하러 가셨답니다. 예배 중에 남성 중창단의 특별 찬송 순서가 있었는데, 나온 세 명의 남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야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큰 체구에다가 걸어 나오는 자세나, 입고 있는 라운드 티, 그리고 팔과 목에 있는 문신들이 보기에도 위압적이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자, 그들의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감동이었답니다. 눈을 감으면 은혜요, 눈을 뜨면 시험이 되어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들이 찬양을 부른 후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짧은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다 야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아내가 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었고, 남편인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하여 결국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하면서 세 사람이 다 왼손을 앞으로 펼쳤는데,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새끼손가락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그 자리에 있는 일본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기에 모두들 숙연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혜를 알고 나니, 그들이 비록 야쿠자의 중간 간부였지만 더 이상 그 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쿠자 두목에게 찾아가서 조직에 더 이상 몸담을 수 없다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에 조직을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야쿠자의 두목이 농담으로 받고 믿어주지 않다가 결국 진심임을 알고 모든 조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탁자에 칼을 꽂더랍니다. 그들은 그 칼로 자신들의 손가락을 자르고서야 조직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대식 목사님은 그 날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선명하게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위하여 무엇을 잘라내었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언약을 맺으시면서 할례를 행하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씀하신 날에 즉시 할례를 시행하여 포피를 잘라내었습니다(창17:23). 또 100세 때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 하실 때에 자식도 잘라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라는 자리를 잘라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에게 유익하다 생각하고 의지했던 것들, 즉 할례 받은 것,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지파, 히브리인, 바리새인이라는 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빌3:7),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8), 배설물로 여기며(8) 잘라내었습니다.
* 그러면 왜 잘라냈을까요? 그것은‘그리스도를 위하여’(7, 8), 잘라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잘라냈습니까?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베들레헴 침례교회 담임목사인 존 파이퍼 목사님은“삶을 낭비하지 말라”(Don’t waste your life)(유투브에서 동영상 참고)는 메시지에서, 지금 사람들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그 후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승진하고 조기 퇴진하여 노후를 즐기고 여행하고 등산하고 전망 좋은 집을 짓고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이나 주우면서 사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는 삶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최선입니까? 아니면 최악입니까?” “저는 최악이라 믿습니다.”라고 외치면서 삶을 낭비하지 말 것을 강조했습니다.
저의 늦둥이 세라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동안 늘 1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시경쟁으로 병든 지금의 학교, 경쟁으로 아이들이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입시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삶을 거부하고, 중학교 졸업 학력으로 남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고교에 입학하지 않고 미인가 학교인 벨국제아카데미라는 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이유는 이 학교가 하나님을 주인 삼고, 하나님의 일꾼을 만들며, 나 때문에 남을 행복하게 만드는 삶을 살자는 것, 성경적 교육이 세상을 압도한다는 이 학교 설립 목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는 “어느 대학을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명에 붙들려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여겨 여러 사람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검정고시를 치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세상의 방법과 방식을 잘라내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보려 결단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중학교 성적이 70점 만점에 69점을 받았던 제 딸은 수석으로 입학하여 지금 필리핀에서 선교와 언어수업을 54일 일정으로 다녀와서 행복한 학교생활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 내게 유익하다 여기는 것을 잘라내니 하나님께서 생각하지 못한 복을 주셨습니다.
이 학교 본관 앞에는 故 이다빈 학생의 작은 순교 기념비 하나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이 학교에서 졸업 후에는 1년간 선교사역을 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은대로 실천하기 위해 학교를 2014년 초에 졸업하고 곧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 사역을 하던 중 말라리아에 감염이 되어 돌아와 회복하지 못하고 스무 살의 나이(2014. 2. 14일)에 순교하였습니다. 인생의 인간적인 목표 즉, 내게 유익하던 것을 이뤄보지도 못하고 죽은 이 아이의 삶은 “최선입니까? 아니면 최악입니까?”
“최선입니다!”
우리도 내게 유익하다 여기는 것들을 예수님을 위해 잘라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유흥이나, 놀이, 재미를 위해 쉴새 없이 모이는 세상 모임, 음식 먹기, 운동하기, 건강 챙기기 급급한 것, 여행, 구경, 영화 등에 분주한 것들,..........
내게 유익하다고 여기는 것들, 하나님을 위한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이제는 잘라내야하지 않겠습니까? 말씀 연구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식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물질을 탐내고, 높은 자리를 탐내고…….하는 행위는 단호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요구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그 때 잘 깨닫지 못하니 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잘라버리셨습니다. 가족, 아내, 사람들을 잘라내셨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셨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니 그것은 희생이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너희 죄를 속하려 살길을 주었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주느냐”가 찬송 구절이 자꾸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목사요 헌신했다 하면서도 하나님께 희생한 것이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잘라내심을 이해하지 못해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말뿐이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자꾸 드리는 데도 더 주십니다.
잘라낸 후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인도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은 할례로 자신을 잘라낸 후 아들 이삭을 얻었고, 아들이 이삭을 바친 후에는 그 씨가 크게 번성하는 복을 오히려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잘라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라내니 그리스도를 얻었습니다(8).
하나님은 내가 잘라낸 것보다 더 좋은 것, 많은 것을 주십니다. 저에게도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음악도 하게 하셨고, 대학교 교수가 되게 하셨고, 복지 사역 등 여러 사역을 주셔서 잘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위하여 무엇을 잘라내셨습니까?”스스로 잘라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제거하여 버리십니다. 그러면 망하는 겁니다.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잘라내고 살길을 찾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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