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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강론) 8:1-10 아들의 이름
음두진 2019-02-24 추천 0 댓글 0 조회 907

아들의 이름/ 이사야 8:1-10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름이 없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침에 태어났다 저녁에 죽는 하찮은 미물도 하루살이라는 이름을 갖습니다. 아름다운 이름, 자랑스러운 이름, 빛나는 이름을 미명이라고 부릅니다. 부끄러운 이름은 오명이요, 추악한 이름은 악명이요, 너절한 이름은 누명이요, 허황된 이름은 허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름의 소유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빛나는 이름, 자랑스러운 이름을 가져야 합니다. 이름에는 긍지와 영광과 존경과 신뢰가 따라야 합니다. 자기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알맹이와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저마다 집안의 이름을 빛내고 모교의 이름을 빛내고, 회사의 이름을 빛나고 마을의 이름을 빛내고 한국의 이름을 빛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름 속에 담긴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입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황금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그가 신대륙을 찾아 나선 것도 황금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황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크리스토퍼'`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마음속은 온통 `황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황금을 쫓는 인생을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콜럼버스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이제부터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자'. 그때부터 콜럼버스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14년 동안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그 기간이 내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보람있는 세월이었다”.

자녀들의 이름 중에 요한, 은혜, 사무엘, 요셉 등의 이름이 많습니다. 이 이름에는 부모님의 신앙적 염원이 담긴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서의 이름은 긍정적인 의미의 명예, 명성을 뜻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어떤 사람에 대한 단순한 외적인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름이란 그 사람에 대한 훌륭한명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을 대단히 명예로운 일로 간주했습니다(8:10, 18:17, 10:7).

그래서 히브리 부모들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의미가 담긴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름에 담긴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이름과 비슷합니다. 우리 이름에도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돌림자를 붙여 이름을 짓기도 하지만 한 글자 정도에는 부모님이 자식에게 원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이름은 명성이요, 명예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에 걸맞지 못하는 인생을 사는 것은 명예를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에서 아무 것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의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는 말도 있습니다.

 

이사야의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1-4)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큰 서판에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쓰라고 했습니다. 분명 그는 큰 서판에 이 글을 써서 그것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경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아들을 낳자 유다의 앞으로 당할 일을 빗대어 이사야 아들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노략이 속함이란 뜻으로 그의 아들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지었습니다.

앗수르가 속히 아람과 사마리아를 쳐서 노략질해 갈 것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실감나게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만큼 국가적 위기임을 깨닫길 원하셨다 사람들은 선지자의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 나라가 속히 망할 것이라고 자기 입으로 시인하게 되니 얼마나 경각심이 생겼을까요?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돌이커지 않았다. 말세를 외치면서도 세상에 대한 욕심을 끊을 줄 모르며또한 세상의 쾌락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 말세를 증거해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자녀와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선지자의 생애는 이처럼 사사로운 생활에서까지 그 시대를 거스려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제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창세기 말씀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5:21에 나타나는 에녹이라는 사람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무셀라를 낳았고 이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65세를 살았다고 합니다. 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매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인데 에녹의 기록은 특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는 말입니다. 그 어느 누구의 족보 기록에도 이 말은 없습니다.

왜 에녹은 다른 선조들과는 달리 특별히 하나님과 동행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의 아들 므두셀라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무투와 셀라가 합쳐진 말로 무트는 셀라는 사람을 지칭하는 뜻입니다. 므두셀라는 창의 사람,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므드셀라는 969세를 살았는데 이후 노아의 홍수심판 때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에녹이 실제로 노아시대의 심판을 정확히 알았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자식의 이름을 창의 사람이라고 짓고 심판을 생각하며 각성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시대를 예표하는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모두가 이 시대의 선지자로서 이 시대의 징조와 예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속정신의 온상 역할을 하고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불신자보다 더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세속적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쓰시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세상 물결이 흐르는 대로 부초처럼 요동한다면 그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증거되겠습니까? 시대의 징조와 예표가 될 이사야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5-10)

 

실로아 물은 기혼 샘물에서 발원하여 예루살렘 도성의 동편을 끼고 흐르는 작고 가느다란 시냇물을 가리킵니다. 이는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느리면서도 은밀한 보호를 뜻합니다. 7절의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에 대조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불신앙으로 인한 두려움과 초조함 때문에 더디기만 한 하나님의 구원보다도 앗수르 군대의 힘과 위용이 더 든든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강물이 범람하여 수리아와 사마리아를 넘어 유다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믿음의 선지자만이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9-10).

 

오늘 이 말씀은 북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이 멸망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세상 나라들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위기와 혼란가운데서도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대적자들이 강할 지라도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연합군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다는 약속을 외면한 채 앗수르와 애굽의 힘을 빌려서 막아 내고자 하였지만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아들을 낳게 하셔서마헬살랄하스바스’ (노략이 빠름)란 이름을 지어주고 그 아이가 내 아빠내 엄마’(3살 정도)라고 하기 전에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메시아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유다백성들은 불안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확실한 말씀으로 안전을 약속해주셔도 그들의 눈에는 침입해 오는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는 유다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땅에 편만한 펴는 날개로 그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한번 선택한 백성은 결코 포기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실제로 마헬살람하스바스가 세 살이 되기도 전에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은 앗수르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주천 722).

유다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싫증을 느끼고 르신(아람왕)과 르말이야의 아들(이스라엘 베가 왕)을 기뻐하였으나 하나님은 제아무리 대적자들이 강할지라도 정한 때에 망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그의 펴는 날개가 땅에 편만하여 어디에 있든지 보호해주시는 분임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위기의 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심하지 말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염려와 불안가운데서 세상의 힘을 기대하다가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할 수 있습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는 분입니다.

앗수르가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온 유다를 점령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지킬 것을 약속하십니다. 여러 민족들과 먼 나라 백성들이 임마누엘의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려고 도모를 하지만, 결국은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룩하다 하며 두려워하며 의지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게 하십니다(1415). 이사야는 불신과 배신가운데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유다 백성들을 보면서, 자신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며 바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멸망의 때에는 모두가 두려워합니다. 어딘가 자기 몸을 피할 피난처를 찾습니다. 한마디로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바로 이때에 이사야는 앗수르 군대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으로 피난처를 삼으라는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심어줍니다 멸망의 때에 주님을 의지하도록 돕는 것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혼란한 세상에서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불안해하는 이웃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며 보호해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어려운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안절부절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염려되고 두려울수록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 피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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