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사야서강론) 7:10-25 징조
음두진 2019-02-24 추천 0 댓글 0 조회 704

이사야서 7:10-25/ 징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무엇이든지 구하라하고 기회를 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만약 심청이가 지금 살아있다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주세요그랬겠지요.

대학입시생들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구할 것이며, 젊은 사람들은 직장과 배우자를 구할 것이며,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건강을 구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통일을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하나님이여, 우리 민족을 의롭고 정직한 국민이 되게 하시고 자기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가정을 행복하게 하시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성령 충만을 주옵소서. 내 인격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숙한 인격으로 바꿔 주옵소서. 삶의 수많은 풍랑들을 잠잠케 하여 주옵소서.”

태의 열매를 간구하는 자매들도 있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안전을 지켜달라고,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게 해달라고, 사업가들은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구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엇을 구할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무엇이든지 구하라고 기회를 주었는데나는 구하지 않겠습니다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유다의 아하스 왕으로 B.C. 700년대 사람입니다. 그 당시는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서 북쪽 열부족은 이스라엘을 형성했고, 남쪽 두 부족은 유다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때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의 위쪽에는 북 이스라엘이 있었고, 그 위쪽에는 다메섹(Damascus)을 중심으로 하는 시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리아의 르신 왕이 이스라엘 왕과 연합하여 유다를 쳐들어오려고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아하스 왕에게 전하였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10-11).

 

이사야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인데,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 즉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니 너는 하나님께 어디서든지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아하스였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드디어 살았구나!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연합군이 우리를 치러 왔지만, 이제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나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내실거다. , 하나님이여 이스라엘과 시리아를 물리쳐 주옵소서. 겨우 두 부족을 갖고는 이스라엘의 열부족과 시리아의 연합군을 당해내지 못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구하여 주옵소서.” 보통 사람이라면 모두 이렇게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말하였습니다.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12).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는데도 아하스는 그 기회를 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본문은 유다 왕 아하스를 만나는 이사야의 모습, 임마누엘 예언이 장엄하게 계시되는 부분, 앗수르와 애굽을 통한 유다의 심판에 대한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승리를 약속하시다가 왜 갑자기 임마누엘 징조를 말씀해주셨을까요?

 

1. 하나님의 이적을 거부하는 아하스 왕이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약속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10-12).

 

유다 왕 아하스는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산림이 바람에 흔들리듯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잠잠하라고 하시며, 연합군은 연기나는 부지깽이와 같이 아무런 힘이 없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이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을 알려주시며 격려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신하고 있는 아하스에게 한 징조를 구하되 하늘에 있는 징조든지 땅에 있는 징조든지 구별하지 말고 구하라고 하였으나 아하스는 거절하였습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지켜주겠다는 정표로 이적을 구하라는 이사야의 제안을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말로 거절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는 말은 겉으로 보면 신앙적인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여호와를 시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인 언행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신 6:16의 금지 계명을 내세워 자신의 불신앙을 포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징조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불신앙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Umbreit)나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능력(Gesenius)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내적인 완고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는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스스로 고안해낸 별도의 대책이 서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상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확실한 세력인 앗수르와 연합함으로 이 국가적인 위기를 넘기겠다는 불신앙의 자세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하스 왕으로부터 위기의 날에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게 됩니다. 말로는 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나의 위기에 적용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보다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해결책인 물질과 세상의 꾀를 의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방식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그때는 순간적으로 문제의 해결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그것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위기의 날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에 힘쓰고 또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살아계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이적을 보이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능력있는 지혜는 없는 것입니다.

 

2. 친히 징조를 주신 하나님 -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징조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13~17).

 

임마누엘예언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싸우겠다는 특별한 정조가 있는 예언입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아하스를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임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어느 때나 늘 함께 하심을 계시하시는 특별한 이름입니다. 아무리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연합군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이 아이가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되기 전에 두 왕의 땅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애굽과 앗수르의 힘을 벌어서 연합군을 막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다는 도리어 애굽과 앗수르의 침공을 받고 처참히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거부한 유다는 자기가 의지했던 앗수르에게 수치를 당하고 그리고 멸망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로 처녀의 몸에서 메시아를 탄생케 하시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실 것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징조를 외면한 아하스 왕에게 특별한 징조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힘을 의지하려는 아하스에게 일방적으로 처녀가 아들을 낳는 이적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하나님이 친히 붙여 주셨습니다. 이 이적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에게, 그리고 자기 꾀만을 의지할 것을 고집하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후의 통첩입니다. 이 임마누엘을 통해서 멸망 중에서도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예언은 드디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으로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요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케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이적적인 탄생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적인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구원의 사역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요, 거부하는 자는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불신앙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정표입니다. 이보다 더 큰 자비와 은혜의 정표는 없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의 외교력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은 의지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굳게 서게 될 것이며,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힘든 때 일수록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위기 일수록 하나님을 믿음으로 역경에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걱정하며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제 자신을 돌아보면 죄와 허물 뿐입니다. 제 자신도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자를 주께서 사랑하시어서 주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주시니 주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요! 오늘 하루도 주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남을 사랑하며 용서하는 하루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아멘.

 

- 삶의 적용- 당신은 위기의 날에 어떤 식으로 해결하고자 합니까?

또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코자 합니까?

당신은 자신의 힘이나 배경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이사야서강론) 8:1-10 아들의 이름 음두진 2019.02.24 0 909
다음글 (이사야서강론) 7:1-9 풍전등화 음두진 2019.02.24 0 644

56110 전북 정읍시 감곡면 진교2길 53 (진흥리, 감곡반석교회) TEL : 063-571-0898 지도보기

Copyright © 감곡반석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15
  • Total46,671
  • rss